살면서 표현의 자유가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술집에서 또는 카페에서 친구랑 연인이랑 연예인 ‘뒷담화’를 하거나, 정치판이 돌아가는 꼴을 조롱하기도 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단지 사이버상으로 옮겨왔을 뿐인데, 새로 법까지 만들어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한다. 피해자가 수사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친절한’ 경찰이 알아서 수사해 주겠단다. 

이 뿐인가. 살던 집에서 강제로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생존권을 되찾기 위해 집단행동을 해도 주변 상가나 주민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할 판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말은 이제 엄두도 낼 수 없다. 방송조차 정부의 홍보 부서 역할만 하게 될 터이니, 진실을 알 수 있는 통로는 또 얼마나 좁아지겠는가? 정부와 한나라당이 국회에 제출해 놓은 법안들이 통과되면, 이 모든 일들은 현실이 될 것이다. 사이버모욕죄, 불법시위집단소송법, 인터넷실명제확대….

지난 3월 12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은 이런 우리의 암담한 미래 전망에 한가닥 희망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한 시대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촛불집회의 주동자로 몰려 재판을 받던 안진걸 당시 광우병대책국민회의 조직국장이 신청한 현 집시법상 야간집회 금지조항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심판하기 위해 열린 공개변론은, 시대적 흐름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줬다.

경찰과 검찰이 줄곧 들이미는 논리는 표현의 자유도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집회를 해서 시끄럽고 도로가 마비되고 떼지어 움직이며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 타인의 평안한 휴식을 누릴 권리나 주변 상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김종대 헌법재판관이 지적했듯 우리 헌법에 왜 하필 집회의 허가제를 금지한 조항을 특별히 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87년 이전과 이후 우리사회의 차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 있다면 답은 간단하다. 집회의 자유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그 어떤 기본권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기본권이라는 뜻일게다. 우리 역사에서 집회와 시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안다면, 이런 논거로 무조건 죄악시할 수 있을까? 혹자는 여기에 덧붙인다. 언론, 출판 등의 자유는 그나마 그 권리를 행사할 만큼의 사회적 지위라도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집회의 자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회적 약자의 최후의 보루라는 것이다.

야간집회가 폭력성을 띨 확률이 높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오히려 현대인은 낮에는 학교 수업 때문에, 직장에 근무해야 하니 밤에 모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해가 지면 대중 집회를 할 수 없다고 막아둔다면 도대체 언제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외국에서도 제한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리처럼 일률적으로 야간집회 전체를 금지하는 곳은 없다. 경찰은 야간에도 종교나 문화행사는 허용하니 당당하게 신고하면 허가해 준다고도 했다. 그러나 작년 촛불집회도 문화제였다. 문화가 무엇인가? 인간 생활의 총화 아닌가? 그 속엔 정치도, 예술도, 도덕도 모두 포함되지 않는가?

또 참가자들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했다고 하나 경찰의 차벽과 진압과정에서 유발된 측면이 컸다. 뭐 백배 양보해 폭력이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대다수의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평화를 외쳤고 또 실제로 즐겁고 흥겨운 문화제를 벌였다. 그러니 ‘야간집회=폭력집회’라는 경찰과 검찰의 등식은 과장된 일반화일 뿐이다.

큰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조금 더 지금보다 합리적인 사회이기를 바랄 뿐이다.  밤이라고 정치적, 사회적 의사 표현의 자유를 막을 이유는 없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이는 당연히 위헌이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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