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문화의 중심지 종로를 찾아서

연두색 웃옷에 풀색 스카프로 곱게 단장한 할머니 한분이 마이크를 잡고 한창 노래 중이다. 강당에 빼곡히 들어찬 의자들 중 빈 자리는 드물다.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아래 복지센터)의 노래마당 풍경이다. 복지센터는 서울시가 설립하고 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 위탁운영을 맡으면서 지난 2001년 개관했다. 만 60세 이상이면 거주지에 상관없이 회원이 될 수 있다. 이곳의 하루 출입인원은 3천명 정도다. 수서에서 온 김연주 할머니는 “노인들 심심한데, 나는 못하더라도 여기서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라 노래하는 걸 보면 참 용기가 대단하다 싶고 노래도 듣기 좋다”고 말했다.

복지센터 벽 여기저기에는 인문학 강좌, 외국어 교육, 정보화 훈련, 금요예술무대 등에 관한 안내문들이 붙어 있다. 각종 노인 동아리들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1년에 한번 ‘탑골대동제’란 축제도 열린다. 이런 문화복지서비스의 특화는 각 구에 설립된 노인센터들과 복지센터를 차별화시키는 점이다. 복지센터의 홍보담당 사회복지사 임태리씨는 “종로는 특히 노인문화의 중심지로 어르신들이 많은 곳”이라며 “구립 노인센터는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주로 요양, 보호 측면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이곳에 오는 노인들은 멀리서 찾아올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노인욕구조사에서는 문화활동에 대한 욕구(28.4%)가 건강활동(38.4%) 다음으로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노인들의 생활공간인 종로를 예술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종로 ‘실버벨트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다. 선두에 나선 것은 영화다. 지난 1월 21일 복지센터 옆 낙원상가 건물 4층의 허리우드 극장에 ‘실버영화관’이 마련된 것이다. 허리우드클래식 김은주(35) 대표이사는 “소외된 어르신들에게 과거 거의 유일한 여가활동이었던 영화를 제공해 문화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실버영화관’의 취지라고 밝혔다.

낙원상가 꼭대기를 찾는 노인들

과거 종로는 서울 최대의 도심이자 단성사, 허리우드 극장, 피카디리 극장 등이 밀집된 영화의 중심지였다. 노인세대는 영화를 보려면 으레 종로를 찾았다. 이런 추억이 탑골공원과 독립운동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자취와 함께 노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아침 10시 30분, 낮 12시 30분, 낮 2시 30분에 시작하는 ‘실버영화관’ 프로그램의 입장료는 2천원이다(57세 이상 관객). 복지센터에서 배부하는 할인권을 지참하면 1천원에도 관람이 가능하다.

26일까지 상영되는 영화는 『미인도』였다. 파격적인 노출장면으로 화제가 된 영화라 노인들의 기호에 맞지 않겠다고 여길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실버영화관’ 영화 선정은 복지센터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상영관 안에 들어서니 좌석의 3분의 1정도가 차 있었다. 관객이 적은 시네마테크 영화관이란 걸 고려하면 꽤 많은 수다. 일반 영화관과 다른 점은 영화 시작 전 광고가 관절염약품과 혈액순환 개선제 광고라는 것뿐이었다.

처음 ‘실버영화관’을 찾았다는 박찬성 할아버지는 “프로그램을 모르고 왔는데 취향에 안 맞는 영화를 볼 수도 있으니 잘 알고 와야 할 것 같다”면서도 “영화는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평했다. 한편 과거 유명한 극장 중 하나였던 허리우드 극장의 변모에 “아니, 허리우드가 이렇게 시시하게 변하다니”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관객도 있었다.

콜라텍과 커피숍, 노인들의 만남의 장소

한때 허리우드 극장 맞은편에는 노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카바레가 있었다. 카바레는 지난 2008년에 없어졌으나, 낙원상가 밑 신발가게의 화려한 싸롱화들은 ‘그때 그 시절’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다른 곳의 업소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서민음식점이 즐비한 낙원동을 지나 동피맛길로 들어가면 피카디리 극장이 나온다. 피맛길 쪽에는 각종 기원과 댄스교습소 등 노인들이 출입할법한 업소들이 많다. 그 중 댄스교습소 앞에 ‘ㅍ콜라텍’을 광고하는 기둥이 있었다.

‘ㅍ콜라텍’이 있는 건물의 지하는 붐비는 영화관이지만 1층은 쇠락한 상점가다. 2층부터 7층까지는 아예 비어있으며, 8층에 뷔페가 있고 9층에 이르러서야 콜라텍이 있다. 눈썹이 도드라지는 진한 화장을 하고 은은한 향수냄새를 풍기는 할머니들을 따라 콜라텍 안에 발을 들였다. 안에는 노래방에서나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조명이 달려 있었다. 나오는 노래는 ‘군밤타령’을 빠르게 리믹스한 곡이다. 빠른 박자와는 달리 사람들의 움직임은 느긋하다. 주로 추는 춤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스텝을 옮기며 추는 ‘사교댄스’였다.

“여기는 소외된 어른들이 모이는 남녀대화의 장이야. 레저 스포츠 즐기듯 찾아오는 거지” 헌팅캡을 눌러쓴 콜라텍 관계자가 말했다. 현재 ㅍ콜라텍은 낮 12시부터 저녁 8시까지 운영하며, 입장료는 1천원이다. 콜라텍을 이용하는 손님은 꽤나 많았다. 승강기 안을 가득 채울 정도의 손님들이 잇달아 오고간다. 노인들이 서로 만나는 곳이 콜라텍만은 아니다. 낙원상가 주위에는 대형 브랜드 커피점과 달리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온 커피숍들이 많다. 이곳의 손님들은 대개 노인들이다. 낙원상가 주위에 이런 커피점들과 젊은 층이 즐겨 찾는 커피빈이 공존한다는 것이 이채롭다.

주체적 노인문화를 향해

종로에 노인들이 ‘주체’가 되는 문화만 있는 건 아니다. 복지센터와 낙원상가 를 잇는 길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천막에서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판촉행사가 진행됐다. 천막 안의 남자는 곡물, 녹차세안수, 쌀 비누, 매실고추장 등을 설명하고 노인들에게 나눠 줬다. 무엇이든 퍼 줄듯 하던 남자는 “홍삼농축액을 가져왔는데 이것만큼은 모두 줄 수 없으니 선전을 잘해줄 사람에게만 한통씩 나눠 주겠다”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선전을 잘해줄 사람’을 구분하는 법은 다양했다. 빨리 손을 들어보라고도 하고, 말을 따라해 보라고도 했다. 노인들은 남자의 지시에 열심히 따랐다.

남자는 40분가량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다 “한 달분을 공짜로 드리는 대신 한 달분을 더 드릴테니 그것은 할부로 돈을 부쳐야 한다”고 슬쩍 말을 돌렸다. 홍삼농축액 한통의 가격은 29만 8천원이었다. 천막 밖의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성명과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를 물으며 주문을 받았다. 할아버지 몇 분이 “그럼 안 한다”며 돌아갔지만 계약에 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판매자측은 “하나 끼워주면서 하나 파는 건 불법이 아니다”라며 “불만제로, 소비자고발센터에서 찾아왔지만 법적인 문제없다고 판정났다”고 떳떳하단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세 천막을 걷고 자리를 떠 버렸다. 인터넷 지식인 게시판에는 이에 관한 사람들의 질문이 여럿 있다. 천막치던 사람들의 정체와 홍삼의 진위여부에 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나 건강에 관심이 많은 노인들을 현혹시키는 상술에 대한 못마땅한 심정은 일치했다.

현재 종로에는 노인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노인들의 문화욕구를 채워주려는 외부의 시선, 노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하려는 내부의 시선, 그리고 노인을 대상으로 삼는 상업적 시선이다. 서울시의 ‘실버벨트계획’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세 가지 시선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주체적 노인문화를 위한 세심한 고려가 요구되는 이유다.

백지원 기자 kaleidoscope@
사진 박선종 기자 ganzi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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