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원래 하얗고 무대는 원래 까맣다. 배우와 관객이 빠져나간 빈 무대 위에는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1킬로와트짜리 조명 100여개가 일제히 빛을 뿌리면 무대는 순식간에 환하게 차오른다. 배우와 관객은 그 빛무리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서로 공감한다. 그 순간 조명은 무대에 숨을 불어넣는 생명의 빛이 된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무대조명의 중요함도 조명을 다루는 조명기술자들의 존재도 좀처럼 눈치 채지 못한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조명이 아니라 바로 그 조명을 한 몸에 받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씨어터S.H 강태우 조명감독은 “조명이 주가 되거나 튀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명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느낌을 살려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강 감독은 또 “조명·음향·배우는 삼위일체”라고 비유했다. 세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만 좋은 무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조명감독은 조명을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상정하고 무대를 비춘다. 만일 조명이 배우보다 주목받는다면 그것은 실패한 조명이다. 우리가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조명보다 배우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다.

지난 9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는 연극 『오셀로』의 무대설치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 지시와 망치질 소리가 빈 무대를 울리는 동안, 극장 밖 한쪽에 자리한 간이의자에서 예술의전당 이보만 조명감독을 만났다.

“지금 시대에는 걸맞지 않게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일이죠”
이 감독이 자리에 앉자마자 처음 던진 한마디다. 무대작업은 기본적으로 사람 손을 많이 타는 일이다. 그는 지난 1993년부터 무대에서 일하기 시작해 처음 7년간은 거의 ‘몸으로 때우며’ 버텼다. 그런 과정을 밟고 나서야 조명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조명디자인을 “작가와 음악가가 만든 작품을 체화시켜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고 그 작품에 가장 적합한 빛의 패턴을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또 “연출의 선을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창작력을 발휘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덧붙였다. 조명디자이너는 원작자와 연출가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해야함은 물론 자신의 해석을 반영할 수 있는 창조적 소양도 함께 갖춰야만 하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이 감독은 “좋은 것을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조명을 디자인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며 “평소에 다른 작품을 관람하고 외부 팀과 일할 때 그들의 작업을 참고하거나 틈틈이 배낭여행을 다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가멤논』이라는 작품을 맡았을 때 그리스인 연출자와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서로 조명 구상을 논의하던 중 여행지의 경험을 떠올려 ‘판테온과 같은 분위기’라고 비유했더니 연출자가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조명이다’라며 맞장구를 쳤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판테온을 본 적이 없어 연상하지 못했더라면 그 때처럼 완전한 소통은 어려웠을 것이다. 평소 쌓았던 폭넓은 경험이 작업에 큰 도움을 준 일례다.

조명은 머릿속에서 그린 이론과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실재가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작업이다. 따라서 논리만으로는 일을 진행할 수 없다. 이 감독은 “직접 조명을 비춰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신할 수 없기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조명기술자는 주어진 공연일정 내에 무조건 모든 일을 마쳐야만 한다. 준비 과정이나 실제 공연이나 늘 생방송을 진행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항상 시간싸움 속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그들의 심적인 압박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 감독은 “때로는 의도한대로 조명이 나오지 않은 채 무대가 흘러가버려 내 생각이 잘 반영되지 못한 점이 아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무대조명 분야가 이처럼 재평가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90년대 이후 조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조명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사회적으로 조명기술자의 전문성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조명이 무대뿐만 아니라 도시디자인,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로 손을 뻗으면서 이제는 ‘조명디자이너’라는 영역을 개척해 기술적 측면 외에도 창작능력까지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무대조명계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이들의 작업장인 공연예술 무대는 전반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연극·무용·오페라처럼 전통적인 장르는 문화관광부의 지원 등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되기도 힘든 형편이다. 또한 아직 직업교육이 체계화되지 않았고 전문인도 많지 않은 편이다. 외국 조명학과로 유학을 다녀오거나 무대예술아카데미와 같은 양성기관을 거쳐 오는 사람도 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장에서 직접 일하면서 배워나가는 경우가 많다. 강 감독은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조명분야를 체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며 “현재 개인적으로 작업을 진행중이다”고 말했다. 이 감독 역시 “무대 관련 직업은 시장이 좁고 일하는 사람도 일 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열악한 환경을 지적했다.

마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조명기술자들 역시 정작 자신에게는 조명을 비출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결코 조명을 받고자 조명을 다루는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남에게 조명을 비춰줄 때라야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조명 뒤로 눈을 돌려 그림자 진 얼굴을 바라보자. 그 속에서 그들은 분명 웃고 있을 테니까.


 글 김서홍 기자 leh@
 사진 박소영 기자 be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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