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권(65)씨가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집에서 강제로 쫓겨났던 해는 88서울 올림픽이 있기 1년 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올림픽 때 무허가 판자촌이 존재한다면 도시 미관상 좋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서울시의 도시 재개발과, 올림픽을 기회로 재개발 이득을 챙기겠다는 민간 기업들의 ‘올림픽 특수’가 깔려 있었다.

권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정부와 민간 업체들이 전경들과 깡패들을 데리고 와서, 상계동을 에워싸는 거야. 수백 명의 깡패들에게는 술을 잔뜩 먹이고 선동을 하는 거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반항하는 사람들은 맘대로 하라고. 그런 사람들과 싸웠어. 이가 부러지는 것은 부상도 아니었어. 어쩔 수 없잖아? 물러나면 갈 곳이 없는데”지금은 경기도 시흥시에서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는 안은정(55)씨 역시 당시 상계동에서 경기도 고강동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하지만 고강동에서 역시 그는 강제 철거를 당해야 했다. 고강동을 지나는 도로에 올림픽 성화가 봉송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화 봉송인가? 그것이 지나간다는 한가지 때문에 또 때려 부쉈어. 정말 잠깐 지나가는 거였거든? 단지 미관상 안 좋다는 이유로.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할 수 없이 안씨와 같은 철거민들은 도로 밑으로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아야 했다. “그 지역이 다 진흙지역인데, 여름에 비가 오면 난리도 아니었지.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었어”

지난 8월 24일 베이징 올림픽이 성황리에 끝났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도시 정비를 위해 도시 빈민들을 베이징 시내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지난 1988년 우리나라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1985년 서울시 목동을 시작으로 사당동, 상계동으로 철거가 이어졌다. 당시 상계동 주민들을 도와 강제 철거를 감시하고 주민들을 지원한 ‘빈민사목위원회(아래 빈민사목위)’의 이강서 신부는 “철거민들 대부분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약한 사람들이었다”며 “당시 아무런 대책 없이 강제철거를 당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그들이 겪은 고통은 대단했다”고 말했다. 이런 철거민들의 고통은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를 찍은 김동원 감독은 아는 신부님의 부탁으로 우연히 가본 상계동에서 당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직접 가서 백주대낮에 열대가 넘는 포크레인들이 집을 부수려 다가오는 광경을 보고나니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철거민들은 불안하다. 안은정씨의 땅도 현재 재개발 대상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씨는 또 불안해하고 있다. 떠돌 수밖에 없는 유목민의 삶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의 판자촌 ‘구룡마을’에도 88서울 올림픽 때의 철거민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1988년도에 이 마을에 왔다는 윤아무개(74)씨는 현재도 일용직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는 “돈 없으니까 여기 올 수 밖에 없었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철거민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또다시 다른 곳으로 생계를 위해 떠났기 때문이다.
빈민사목위의 이 신부는 사회 구조상 빈부의 양극화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다고 진단한다. 그는 “그 당시 강제 철거를 당한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도 대부분 가난을 피할 수 없다. 더 열심히 일해도 더욱 가난해지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또 그는 “투쟁을 통해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 사람들도 있지만, 단결하지 못했던 개개인은 그런 보상을 받지 못했고, 그 이후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한 사례가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의 김진홍 이사장은 “그들 대부분이 88년 당시부터 2008년에 이르는 지금까지 기본적인 인권, 주거권, 가족 단위의 삶이 철저히 유린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신부 역시 “풍요를 향한 질주는 그만돼야한다”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빈곤한 것이 문제다”고 말했다.

최명헌 기자 future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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