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품은 옛 삶의 자취, 궁(1)

 

  우리는 서울에 남아있는 궁을 ‘고궁’이라 부른다. 조선 왕조는 끝났고 궁 안에서는 더 이상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안에 살았던 모든 영광과 역사도 조금씩 잊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궁은 소음과 매연이 넘치는 차도 옆에서 세월이 흘러도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불렀다. 그렇게 사람들을 부르던 궁은 드디어 그들과 마주했다.

 지난 5월 4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된 ‘하이서울 페스티벌(주제-서울의 봄, 궁에서 활짝 피다)’은 시민과 궁 모두의 축제였다. 여드레 동안 다섯 개의 궁에서 진행됐던 갖가지의 행사는 옛 사람들을 되살려 현대인들과 소통하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시청 앞에 드리운 축제의 기운을 통해 우리는 궁궐 앞, 그 커다란 나무문을 쿵쿵- 하고 두드렸다.

든든한 맏이 경복궁

 조선의 으뜸 대궐이었던 경복궁은 가장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진 궁이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궁이다. 현재 경복궁은 광화문과 함께 복원작업을 하고 있어 커다란 천막을 둘렀지만, 곧 더 아름답고 완성된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괜시리 설렌다.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이다. 광화문으로 들어가 흥례문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전의 입구인 근정문이 보인다. 이렇게 이어지는 동선은 궁궐의 중심축으로 지난 2001년 흥례문이 85년만에 복원되면서 다시 살아났다.

 알록달록 단청의 꽃이 핀 근정문을 열면 병풍처럼 펼쳐진 인왕산 자락과 환하게 펼쳐지는 뜰이 보인다. 빈틈없이 깔린 돌들 위로는 임금이 행차했던 어로가 뻗어있다. 뙤약볕 쪼이는 널찍한 마당에 꼿꼿하게 서 있는 품계석에는 신하들의 기상이, 창호문 사이사이에는 이른 아침 조회를 진행하던 왕의 부지런함이 새겨져있다.

 근정전 난간을 꼼꼼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돌짐승들이 보인다. 개와 돼지를 뺀 십이지(十二支)와 사신(용, 호랑이, 주작, 현무)들을 익살스레 새긴 이 돌상들은 사방에서 근정전을 지키고 있다. 이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새끼를 품은 한 쌍의 돌 개다. 바깥도둑을 지키기 위해 돌 개의 식구들이 총출동 했다.

 차근차근 발걸음을 옮겨 좀 더 깊숙이 경복궁 안으로 들어간다. 교태전은 굳이 들어가 보지 않아도 꽃이 새겨진 돌담에서 궁 안의 여인네들의 삶이 전해진다. 왕비의 거처였던 이곳은 ‘중궁’ 또는 ‘중전’이라 불렸다. 중전마마는 바로 여기서 나온 명칭이다. 대비마마의 침전이었던 자경전의 돌담 역시 십장생과 해와 달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지나가는 이의 눈길을 잡아끈다.

 경복궁 안에는 두 개의 큰 연못이 있는데 경회루와 향원정이다. 경회루는 네모반듯한 모양에 웅장한 모습으로 사신 접대 등의 공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곳이다. 반면 향원정은 수면에 유유히 떠 있는 연꽃잎들 위에 핀 연꽃처럼 다소곳하고 예쁘다. 꽃과 나무들이 즐비한 이곳은 임금이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경복궁은 가장 오랜 시간동안 왕들의 일생을 보았고 담았던 곳이기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내밀한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조선 팔도를 바라보며 위대한 역사를 꿈꾸던 임금과 그를 돕던 신하들의 열정이 곧게 뻗은 기둥처럼 아직도 여기저기 서있는 것만 같다.

오랫동안 잃었던 이름, 경운궁

 경운궁은 본래의 이름보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덕수궁은 억지로 황제 위에서 밀려난 고종을 가리키는 궁호(물러난 왕이 머무는 궁의 명칭)이지 본명이 아니다.

 경운궁은 파란만장했던 대한제국의 10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고종의 승하 이후 주인 없는 궁이 되면서 일제의 훼손이 극에 달해 지금은 예전의 3할 정도만 남아있다.

 현재 경운궁의 대문인 대한문을 지나 중화문 안으로 날렵하게 들어가면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을 만날 수 있다. 광무 6년(1902) 경운궁이 중건될 당시에는 중화전도 경복궁 근정전과 비등한 규모를 지녔었다. 하지만 얼마 후 화재가 일어났고 곧 소실된 부분이 복구됐으나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옛 기개를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종은 ‘군색한 때를 만나 넉넉히 할 겨를은 없었지만, 어찌 토목의 일을 근실히 하지 않을것이랴(경운궁 준공조서)’라며 이를 아쉬워했다.

 중화전을 떠나기 전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중화전의 답도(왕이 가마를 타고 오르는 길)다. 오로지 중화전의 답도에만 용을 새겨 넣었고 다른 궁궐들은 봉황을 새겼다. 중화전의 천장에 떠 있는 용도 날아오를 듯 꿈틀거리지만 근정전 천장에도 역시 용이 있기에 그 희소함이 답도보다는 덜하게 느껴진다. 주변에 채색된 화려한 단청들을 박차고 여의주를 꼭 쥔 채 날아오를 듯한 용에게서 나라가 흥하길 바랐던 옛 사람들의 희망이 느껴진다.

 경운궁의 건물들은 마주칠수록 세세한 손길들에 눈이 간다. 고종이 승하하신 함녕전은 특히 그렇다. 편액(간판) 곁에 빨강, 파랑, 주홍등으로 수놓인 색색의 무늬를 시작으로 건물 전체에 질서있게 펼쳐지는 단청은 이미 말할 것도 없다. 처마선을 따라 이어지는 색동저고리 같은 문양과 지붕 위 삼각면의 조밀한 장식은 눈과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다. 곱게 바른 창호지 문 위에 놓인 황금색의 조각장식도 우아함을 뽐낸다. 겉은 화려한 색으로 단청을 넣었지만 내부에는 한 톤 아래의 색으로 단청을 넣어 고고한 느낌이 감돈다.

 함녕전에서 덕홍전을 돌아가면 보이는 정관헌은 건물 자체에서 동서양의 혼합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늘게 빠진 기둥과 붉은벽돌, 겉에 두른 철제 난간은 얼핏 보면 낯선 서구식 건물인 양 보인다. 하지만 지붕과 기둥머리의 조각은 보자마자 전통 궁의 지붕을 떠올리게 한다. 정관헌의 뒷면은 아예 서양식 벽돌집인데 조그마한 쪽문은 과거 러시아 공사관으로 통하던 지하 비밀 통로의 입구다. 열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던 대한제국의 고뇌가 눈으로 스며든다.

 경운궁은 구한말 한반도의 몸부림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반도를 집어 삼키려던 일제에 의한 생채기부터 서구 열강들의 이빨이 스친 자국 까지도. 그래서 궁 내부를 거닐면서 느끼는 바는 어떠한 감흥보다도 서글픔이 크다. 마치 우수를 머금은 듯 하늘을 바라보는 처마 끝 들은 그 사이에서 한 많은 역사를 되묻고 또 되묻게 한다.

  글 김규진 기자 loveme@
사진 김지영 기자 euph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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