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대학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마뜩치 않다. 회의장소 찾는 일이 골치 아프다. 지금은 고즈넉했던 교정에서 지붕 낮은 교사를 드나드는 학생들로 다정다감했던 시절이 아니다. 외부인에게 친절한 학생이 위치를 알려주고 그 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약속한 건물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시절과 거리가 멀어졌다.

대기업 로고를 앞세우는 빌딩이 역사와 개성이 간직된 교사를 난폭하게 부수고 위압적으로 치솟자 교정은 배려를 잃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소음과 매연으로 새 울음소리를 잃은 교정은 사색을 거부한다. 건물이 늘어난 만큼 젊음도 넘치지만 교정은 다정다감하지 않다. 체계 없이 배치된 건물의 생뚱맞은 이름은 듣는 이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따름이다. 책이나 사색보다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으려 종종걸음치는 학생들은 난감한 표정의 외부인이 귀찮을 것이다.

청계광장은 요즘 탄생 이래 최대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청계광장에 모이는 청소년을 2.0세대라고 한다. 386 다음세대라는 의미일 텐데, ‘88만원 세대’를 이을 요즘 대학생과 나이 차이가 작다. 한데, 청소년들이 촛불 켜고 청계광장에 모일 적에 이 땅의 대학생들은 원더걸스 공연장 앞자리를 선점하려고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몇 년 앞에 발생되었다면 그때 청소년이던 지금 대학생은 모르는 척했을까. 삼사년 후라면, 대학생이 된 요즘 청소년들은 청계광장으로 모일까.

지하철에서 토론으로 진지한 대학생을 보면 반가웠다. 슬며시 다가가 주제를 엿듣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실망한다. 텔레비전에서 시시덕거리던 연예인들의 가십이나 드라마 내용이 차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교양서적은커녕 지하철에서 소설이나 만화책을 읽는 대학생도 드물다. DMB에 시선을 고정하거나 MP3에 귀를 모은다. 어쩌다 만난 교양서적을 읽는 대학생은 리포트를 위한 고역임을 자조한다.

연구비의 높낮이로 철밥통이 보장되는 교수들은 돈과 권력의 요구에 쉽게 굴종한다. 역사와 전통보다 최첨단을 자랑하면서, 사색의 폭이나 깊이보다 외양에 마음이 빼앗기면서, 대학은 제 역할을 잊었다. 기업이 요구하는 표준에 자신과 학생의 개성을 억압하는 대학은 이웃과 내일을 위한 ‘생태적 상상력’에 인색하다. 생태적 상상력은 타자의 개성을 배려할 때 빛을 발하는데, 경쟁사회 진입을 위한 경쟁으로 지쳐버린 대학생은 자신의 개성마저 잊어버렸다.

대학교수가 출연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자. 주장이 엇갈린다. 사색이 부족한 이는 어느 주장에 진정성이 있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행동은 꿈도 못 꾼다. 경부운하가 그렇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의한 광우병 걱정에 관한 논의들이 그렇다. 유전자조작과 배아복제의 안전을 놓고 제 뜻을 펼치고 행동할 대학생은 얼마나 될까. 톰 크루스 아기의 젖니가 몇 개인지 아는 학생보다 적을 것이다. 국회의원 후보의 과거 행적이나 향후 정책의지보다 리포트 겉장에 신경 쓰는 학생이 더 많은 건 교육을 인적자원 양성을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는 기성세대의 성과다.

연세대학교는 한때 ‘에코 캠퍼스 운동’을 다짐했다. 전통 어린 건물을 보전하려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일었던 그 운동은 지금 활발한가. 학교당국과 교수와 학생과 동문가 모여 뜨겁게 움직이는가. 에코 캠퍼스는 그루터기에 앉아 하이데거를 읽다 홍여새와 울새의 울음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던 숲이 남아 있는 시절에서 멈추거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학생의 내일을 배려하는 공간이 캠퍼스라면 다양성과 순환이 어우러지는 공간이 에코다. 번쩍이는 외양이 아니라 사색과 연구로 점철되는 교정에서 학생의 개성과 내일을 배려할 때, 에코 캠퍼스 운동은 빛을 발할 것이다.

피가 끓는 대학생은 지금도 청계광장을 간다. 깊은 사색으로 그들은 개성과 체온은 억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가 식은 젊은이는 부려먹기 쉬울지 몰라도 그들에게 이웃을 배려하는 창조적 에너지를 기대할 수 없다.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곧 2.0세대가 노크할 텐데, 대학은 제 역할을 되새겨야 한다.

박병상(인천 도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