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네 주위의 이웃을 도우라는 말이 있다. 추상적인 현상에 고민하지 말고, 그 이면에 가라앉은 현실을 보라는 말이 아닐까? 물론 몇 남아있지 않은 투사이자 로맨티스트를 제외하곤 현실도, 이웃도 발견하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 대부분의 하나다. 나의 관심은 내 일상적인 삶에 국한되며,가끔 주입된 양심과 비도덕적인 사건이 만날 경우 일회적인 분노가 끓어오르긴 하지만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런 소시민적 행태에 자괴감마저 금방 가라앉는 삶은 이 시대에 아주 보편적이다.

그런데 그런 보편성의 막을 뚫고 올라갈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초적인 폭력과 탄압이 자행되는 그 곳,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연일 뉴스와 인터넷에 보도되는‘티베트 사태’.

 브래드 피트 팬이라면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알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으로 범벅된 영화이며 나 역시 그 세례를 받은지라 더 이상의 관심 대신, 그저 이상적인 여행지로 기억했다. 그러나 최근의 보도 자료와 다큐멘터리를 보며 티베트의 현실을 알게 됐다. 충격을 표현하자면 ‘님좀짱’인듯.

일제 강점기의 조선이 떠오르는 티베트에서는 이라크는 좀 싸워보기라도 했지(전쟁과 희생자에 관련된 얘기는 아니다) 내전도 아닌, 다른 민족에 대한 일방적인 탄압이 줄곧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87년 이후 민주화 사회로 진입했다(?). 거시적인 문제는 해결된 듯싶었고, 이제 개인의 관심은 각자의 삶에 치중했다. 87년생인 나는 그 대표적인 모델이라 자부한다. 물질적인 발전도 엄청나며 세상은 살기 편해졌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세상은 ‘발전’이란 이름으로 상냥하게 우리의 관심을 거두고 고립시키며, 합리적으로 약자의 슬픔을 배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경제성장에 치중하는 한족과 공산당은 티베트에게 물질적인 경제발전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서남공정의 일환으로 티베트의 문화와 역사를 삭제하고 인류의 보편이념인 자유와 인권은 사라졌다. 어째서?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의 집결체이며 티벳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그 여파가 다른 소수민족에게까지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마치 박정희는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실제로 그 성장은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을 딛고 올라선 것이건만, 그 시대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와 같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음은 비겁한 변명이며 비난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소시민인 내가 여기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봐야 뭐가 변하겠는가.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신기한 것은 티베트 사태에 충격을 받은 후,나의 관심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선 시위가 일어나는가? 특검은 삼성의 뇌물수수와 불법 승계를 제대로 조사하는가? 태안 주민들의 삶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 학교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티베트인들처럼 재일 조선인이나 조선족역시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은 너무나 거대하며 나의 관심은 빈약하고 용기마저 없다. 그러나 희망한다. 수많은 이들의 관심이 현실을 발견한다면 자연스럽게 뭔가 변하지 않을까?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현실에 관심을 가져보라 꼬셔 본다. 변화는 신기하고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세상과 현실은 다르다.

/곽승희(국문·06) soya-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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