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로]

어느 늦가을 저녁, 따뜻한 남쪽을 향하던 제비 한 마리가 행복한 왕자의 동상 발등에서 잠을 청하는 순간, 행복한 왕자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생전 불행을 몰랐던 왕자는 죽어 동상이 되자 세상의 온갖 슬픈 일을 지켜보게 된다.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을 치장한 수많은 보석을 떼내어 그들에게 나눠주게 한다. 남쪽으로 날아갈 시기를 놓친 제비는 왕자를 장식한 모든 보석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주기를 끝내자 동상의 발아래 얼어 죽는다. 봄이 오자 마을 사람은 왕자의 동상이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있자, 창피하다며 부숴버렸다. 그러나 이 모습을 지켜본 하느님이 천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가지 물건 즉, 제비와 왕자의 심장을 가져오게 해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게 했다.

나는 지난 12월 “행복한 왕자”라는 이 짧은 이야기 하나로 종강의 변을 대신했다. 종강 후에도 백양로에서, 신촌 뒷거리에서 문득문득 만나게 되지만 그래도 마지막 강의는 헤어짐으로 인해 묘한 느낌을 준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이 얘기는 19세기 말 산업혁명과 함께 불어닥친 당시 영국사회의 이기주의, 물질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타인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와일드는 비록 살아서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속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다 배척받았지만, 사후에는 1백여년만인 1998년에 트라팔가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인정받았다.

나는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되새길 때 마다 우리 사회의 이타주의(altruism)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지난 해, 세계를 달구었던 '디지털 노마드' 개념을 창안한 자크 아탈리는 이타주의가 미래의 세상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는 이타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자본주의만큼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혼자만 전화기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네트워크 사회에서 개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사회에서는 타인의 성공이 곧 나에게 도움이 되고, 타인의 불행은 내게도 재앙이 된다.

나는 행복한 왕자를 연세 학생들에게 들려줄 때마다 와일드나 아탈리가 우리에게 던져 준 이타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생이란 산타클로스를 철석같이 믿다가, 믿지 않다가, 스스로 산타클로스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삶은 두루마리 휴지와 같아서 얼마 남지 않을수록 빨리 돌아간다. 모두들 내 주장만 옳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발버둥치며 악악대던 한해가 훌쩍 멀어져 갔다.

속절없이 보낸 지난 한해, 우리는 남을 위해서는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홍보영상학부 출강) yule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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