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자연물 그대로를 화장도구로 이용했다. /조형준 기자 soarer@yonsei.ac.kr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위 광고 문구는 수 년째 한결같은 이미지를 고수해 온 10대 전용 화장품 회사의 슬로건이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모델들이 자신의 깨끗하고 맑은 피부를 자신있게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방송전파를 탄 후, 이 화장품은 지금껏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것은 그동안 ‘성인여성’들만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화장이 청소년에게도 확대되면서 한창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또한 ‘맑고 깨끗한 피부’라는 모든 여성의 로망을 정확하게 짚어낸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요즘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화장을 한다. 간단한 스킨·로션에서부터 미백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남성화장품의 종류와 가짓수는 여성의 그것 못지않다. “남자도 자기관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화장이 이상할 것도 낯설 것도 없다”는 서경대학교 미용예술학과 김주연 교수의 말처럼, 이제 화장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현대인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이런 화장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화장의 뿌리를 찾아서 학자들은 화장이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왔다고 말한다. 일찍이 화장은 아름다워지는 수단으로 사용돼왔지만 원시시대에는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인 이유로 행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신의 부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악령과 병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주술적인 욕구로서 화장을 하기도 했으며 곤충·동물 등과 같은 위험한 적을 피하는 위장술로 쓰이기도 했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양정진 학예연구사는 “화장의 기원은 민족마다 풍습·생활환경·역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를 단정 짓기 힘들다”면서 “하지만 화장이 유사 이래 그 어떤 동물들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문화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기원전 7500년 이집트에서 인류는 본격적인 화장을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눈썹을 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눈썹을 과장되게 검게 그려 큰 눈을 강조하는 화장을 했다. 이러한 눈 화장은 미용의 목적 외에 곤충의 접근과 강한 태양광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발달한 이집트의 화장술은 강한 색채감과 세련미를 자랑하는데 그 절정을 이룬 게 클레오파트라다. 그녀의 완벽한 화장기술은 타국에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유명했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녀의 모습을 본 떠 화장하는 연예인도 많다.한편 중세에 들어서면서 화장은 기독교의 금욕주의와 더불어 신이 주신 인간의 얼굴을 가면으로 감추는 행위로 간주됐고, 더럽고 저속한 것으로 여겨져 경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는 나아가 목욕마저 제한당해 악취를 감추기 위한 향수가 발달하게 되는 웃지 못할 역사를 낳게 된다. 그후 근세시대에 이르러 화장은 사치스런 문화의 발달과 함께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화장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잠잘 때도 옅게 볼 화장을 할 정도로 화려하고 무분별한 화장이 성행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좀더 자연스러운 화장과 더불어 청결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20세기 초반에는 화장품의 대량생산이 이뤄지면서 화장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 화장박물관에는 시대별로 화장의 역사가 소개돼 있다. /조형준 기자 soarer@yonsei.ac.kr

웅녀도 미백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는 어떨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흰 피부의 소유자를 귀인이라 생각해 백색피부를 숭상해왔다. 양 학예연구사는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에게 미백효과가 있는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한 것은, 백색피부를 가꾸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는 삼국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발달했는데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 여인의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사용한 화장품으로는 쌀가루, 분꽃씨 등을 이용한 ‘백분’과 홍화로 만든 ‘연지’, 밤나무 등을 태운 재로 눈썹화장을 할 수 있는 ‘미묵’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청자 문화의 발달로 견고하고 화려한 화장용구를 제작해 널리 사용했으며 신분에 따라 화장법도 달라졌다. 기생은 하얗게 분을 바르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는 반면, 여염의 규수나 부인들은 평상시에는 화장을 하지 않다가 연회나 나들이 때만 은은하게 엷은 화장을 함으로써 기생들과 분명한 차별을 뒀다.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유교윤리에 따라 사치스런 화장풍습이 제한됐으며 검소하고 실리를 중시하는 화장 문화가 지속됐다. 이는 장기간 지속된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제적인 빈곤을 겪었던 것도 한몫 했다. 19세기 말에는 서구문화의 유입에 따라 신식 화장법과 화장품이 유행했고, 191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박가분’을 시작으로 화장품의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면서 오늘날의 화장 산업 및 문화의 발판이 마련됐다.

쌩얼 열풍, 그 진지한 패러독스

“현대의 화장은 인간관계에 있어 여성에게 필수조건이 됐다”는 서경대 김 교수의 말처럼 현대 사회는 개인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 외모를 중시한다. 하지만 외모가 그 사람의 경쟁력으로 인식되는 것은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다. 현대에 이르러 그것이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됐을 뿐, 화장의 오랜 역사를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숭상은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쌩얼(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열풍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진정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화장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저 예의를 차리거나 관습에 따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실은 쌩얼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은 것 아닐까. ‘화장 권하는 사회’, 그 속에서 원치 않는 화장을 강요당하는 건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노릇이다.

/강조아 기자 ijoa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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