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준 웹미디어부장

○   가끔 살다보면 발칙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감지 않은 머리에 슬리퍼를 끌고(삐져나온 발가락 위에 새까만 페디큐어가 칠해져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학교를 나온다든지, 백양로 한가운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도망간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그야말로 상상 안에서만 벌어질 뿐이고, 혹여나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 없는 일탈에 불과하다. 순간의 짜릿함을 동반하는 일탈 말이다.

○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나를 ‘우리’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를 ‘오늘을 살아가는 대학생’이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런 일탈에 매우 익숙하다. 강의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 ‘전자 출결에 그냥 찍고 나가는’ 학생들이 많다. 축제 때는 일상에서 벗어나 술독으로 향하는 일이 다반사다. 덧붙이자면 나는 학교가 아닌 서울의 동남쪽에서 ‘원시림’ 응원을 하는 학생들을 본 적도 있다.

○   하지만 우리는 일탈에 익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상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부족한 것 같다. 예컨대, 최근에 회칙개정 덕분에 다시금 문제시됐던 ‘밤길 에티켓’이 그렇고 아카라카가 그렇다. 아무리 밤길이 무섭다고 외쳐봤자 ‘너희가 치마 입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한다. 무대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아무리 여가수의 은밀한 곳을 계속 비춰도 ‘섹시가수인데 섹시하면 됐지’라고 환호만 지른다. 아카라카에 ‘K대생 난입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성공적인 건가.

○   누구나 일상에 기반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일상성에 의문을 품는 데에는 서툴고 관심도 없다. 사실 일탈보다 더 필요한 것은 일상 안에서 조금씩 일상을 바꿔나가는 일일 텐데 말이다. 일탈은 일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공고히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오늘 한 번 놀았으니 다시 일상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일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일탈이 아닌 ‘일상성에 의문을 갖고 경멸하는’ 일이다.

○   도대체 왜 이럴까? 사회가 원래가 이랬고, 우리는 이렇게 자라오고 길들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용기부족 문제도 있다. 일상에 의심을 품으면 사회에서 낙인이 찍히게 마련이니까. 하여간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연구자들이 할 일이고,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의심해 보기만 해도’ 괜찮다. 그 정도로도 첫걸음 치고는 충분한 셈이다.

○   가끔 살다보면 정말 ‘발칙한’ 상상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왕조시대에 ‘인간은 누구나 하늘’이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고, 3S산업으로 포장된 군사독재를 부순 87년의 학생들도 있었다. 사실 지금 시대가 좋다고, 행복한 시절에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정말 ‘당연히 좋은 것인지’, 정말 ‘Politically Correct’한 것인지 의문이 간다. 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일상성에 경멸을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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