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미술관만이 큰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뒷골목에 숨은 예술가들의 집에서 찾아낸 그들의 자취가 우리에게 더 큰 감흥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들의 흔적이야말로 우리의 무미건조한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원천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그 자취를 남긴 공간을 우리는 얼마나 배려하고 있을까?

성북구 성북2동 최순우 옛집

성북동 ‘최순우 옛집’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지난 1976년 이사해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근대식 한옥이다. 1백20여 평 대지에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로 이뤄진 전형적인 경기지방 한옥으로 사랑방에는 선생이 쓰던 책상이며 책들이 아직까지 남아 빈 자리를 지킨다. 대청에는 선생이 사용했던 돋보기, 파이프 그리고 여권과 직접 집필한 원고가 전시돼 있다. 선생이 살아 생전에 그토록 아꼈던 이 공간에서 일상의 번잡함을 잊고 집필에 몰두하던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아래 내셔널트러스트)’의 김미현 간사는 “김환기 화백과 건축가 김수근 선생을 비롯한 여러 문화예술인들이 왕래하던 곳으로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며 찬사을 아끼지 않는다.

▲ 내셔널트러스트에서 관리 중인 고(故) 최순우 선생의 옛 집 /김평화 기자 naeil@yonsei.ac.kr

이곳은 원래 선생의 가족들이 살았으나 내셔널트러스트가 그들로부터 매입하고 소장품을 기증받아 ‘시민문화유산 1호’라는 별칭으로 지난 2004년 문을 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정부의 지원이 아니라 시민의 기증과 기부로 개관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 간사는 “시민들이 모은 기금으로 지켜진 이 집은 앞으로도 생기있는 공간으로 보전돼야 한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했다.

최근 내셔널트러스트는 근현대 한국 최고의 조각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권진규 선생의 아틀리에를 여동생으로부터 기증받아 시민문화유산 3호로 등록했다. 성북구 동선동에 위치한 이곳은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사망 전까지 14년 동안 작업했던 장소로 보수공사를 거쳐 오는 6월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문화유산, 시민 곁으로 한걸음 더

유럽 등지에서는 일찍부터 예술가들의 자취를 잘 보전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으나 우리나라는 근대문화유산의 가치에 주목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집을 원상태로 복원하는 데서 시작해 활용하는 단계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2001년 근대문화유산 중에서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조치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문화재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는 문화재보호법을 공표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이승재씨는 “대부분의 근대문화유산이 철거 또는 훼손될 위기에 놓여 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도입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소유주의 자발성에 기초하는 신고 위주의 제도이므로 등록에 대한 동의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문화유산 보호에 관한 논의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기에 보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들의 고택도 상당수 존재한다.

▲ 작곡가 홍난파. 이곳에서 그의 천재성은 빛을 발했다. /윤영필 기자 holinnam@yonsei.ac.kr

종로구 홍파동에는 홍난파 선생이 살았던 아담한 2층 벽돌집이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이 1935년 사들인 이후 말년을 보내며 작곡 활동을 펼친 집이다. 지난 2004년 이곳을 소유주로부터 힘들게 사들인 종로구는 지상의 거실을 가곡과 동요 등을 연주하는 소규모 공연장으로, 지하는 유품을 모아놓은 전시장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종로구청 문화진흥과 윤여길씨는 “공연장으로 문을 열려고 하지만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작업과정이 지연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종로구는 홍난파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원서동에 위치한 고희동 화백의 가옥도 올해 안으로 매입해 보존에 힘쓸 예정이라고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술가들의 집을 근대 문화예술 흐름의 한 명맥으로 분명히 인식할 때 이와 같은 실질적인 활용 방안이 탄생할 수 있다.

▲ 이상 생가에 이상한 서당이…/김평화 기자 naeil@yonsei.ac.kr

한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에는 작가 이상 선생의 스무 해 넘게 살았던 집이 지금은 한복집과 한문학원으로 변해 힘겹게 기왓장을 떠받치고 있다. 한문학원을 운영하는 조성산씨는 “뼈대라든지 담과 지붕은 그대로지만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구조가 많이 변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곳이 이상이 살던 집이었구나’ 하는 말 외에 딱히 그를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3년 전에 김수근 문화재단에서 이 집을 매입했지만 원상 복원해 ‘이상 기념관’으로 만든다는 계획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예술가들이 살았던 집을 직접 찾는 경험은 벅찬 감회를 안겨준다. 설사 어렵게 예술가들의 집을 찾아내더라도 아직은 관리와 보존이 미흡해 아쉬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공간이 숱하게 품고 있는 아름다운 보물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들의 치열했던 삶과 낭만, 그리고 시대적 정서를 만끽해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위문희 기자 chichanm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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