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유를 창출 vs 유에서 새로움을 산출’
최근 가수 MC몽과 이승철의 노래가 타 가수의 곡을 베꼈다는 의혹에 휩싸이면서 가요계에 표절 논란이 일었다. 특히 MC몽의 노래는 결국 법원에서 표절이라고 판결까지 나면서 세간에 ‘문화에서의 표절’이라는 주제를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렸다. 잊었다 싶으면 한번 씩 고개를 드는 표절 논란. 문화에 있어서의 창작과 베끼기의 경계는 어디며 그 둘 사이의 줄다리기는 언제 끝이 나는 것일까.

국어사전에서 표절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문화 전반에 있어서는 그 범위를 부정적으로 ‘베끼는 모든 것’이라고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현재 베끼기는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벌어지고 있다. 문학에서의 표절, 교수의 논문 베끼기, 산업 스파이, 일본 TV프로그램 베끼기 등 우리 주변에는 많은 ‘도둑’들이 있다. 상경대 락밴드 ‘헤드락’에서 드럼을 맡고 있는 김진호씨(경제·05)는 “표절은 근절해야 할 행위이며 분노를 느낀다”고까지 말한다.

▲ 미니홈피, 블로그에서 사진 무단 사용도 불법 /김영아 수습기자 chunchu@yonsei.ac.kr 베끼는 것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단 도용’이다. 이에 대해 저작권법, 상표법, 특허법 등 지적재산권에 대한 법률적 보호 제도가 있지만 이러한 ‘재산화’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음악 표절의 경우 승소율도 낮고 배상액도 적어 아예 소송을 걸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번 MC몽의 경우에도 배상액은 1천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비효과적인 처벌로 인해 표절을 해도 버젓이 얼마 후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법적인 처벌의 강화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법 제도에 의존하기보다는 창작행위를 하는 사람의 개인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한편, 문화계에서는 저명인사의 역할도 요구된다. 영향력 있는 인사가 ‘비표절·양심 창작 운동’과 같은 것을 주도한다면 그 효과는 클 것이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반대 1인 시위는 주제는 다르지만 그 반향이 매우 컸다는 점에서 좋은 선례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차용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모든 현대 문화현상은 이미 차용·창조·표절의 삼각형 안 어느 좌표에 점을 찍고 있다. 이 중 특히 패러디는 한번 자세히 생각해볼 문제다. 이는 단순히 원작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페인팅, 패러디, 패션의 상호텍스트성』의 저자 김미갑씨는 ‘과거의 것에 대한 재해석과 재읽기가 수행될 때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고 했다. 또 언론홍보대학원의 이나영씨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창조의 특징으로 ‘새로움’과 ‘정신적 에너지’를 꼽았다. 이때 정신적 에너지란 새로운 사물의 제작에 쓰인 작가의 내적·주관적 체험을 뜻한다. 영화에서의 ‘오마주(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 사혁의 육법 중 ‘전이모사(선인의 그림을 본떠서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일)’ 등이 단순히 베끼는 것이 아님을 인정받는 이유는 이와 같은 정신적 에너지 때문이다. 영화 『언터쳐블』에서 유모차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유명한 오마주에는 『전함 포템킨』의 에이젠슈타인 감독에 대한 경의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자신의 고민이 녹아 있는 것이다. 문화에서 ‘창조’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새로움은 문화 향유의 본질이자 실체다. 이런 저런 ‘문화적인 실험’들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새로운 컨텐츠나 장르, 기법 등이 많이 시도돼야 문화의 창조성과 다양성도 풍부해진다. 창조자는 기발한 상상력과 발상, 매체를 이용해 ‘뭔가 다른’것을 만들어내고 수용자는 열린 눈과 개방된 자세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창조적 시도는 보수적 시각에 부딪히기도 한다. 마르셀 뒤샹의 「샘」은 1917년 발표 당시에는 거센 혹평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 1위로 뽑힐 정도이다. 최근의 퓨전 공연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도 이처럼 새로운 컨텐츠의 개발에 공헌하고 있기 때문이다. 퓨전공연의 한 관계자는 “여러 시도가 있으면 당연히 결과물이 나오는 법”이라며 문화적 실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건축에서도 종이와 컨테이너만으로 지은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이 지난 10월 선보여 그 기발함을 뽐내고 있다. 이는 소마미술관 야외 조각공원에 설치된 것으로 건축물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어서 지방 순회 전시도 계획 중이다. 인문학을 통한 컨텐츠 개발 연계전공인 ‘디지털예술학’중 ‘영상문화기획’을 강의 중인 이하나 강사는 “하드웨어 발전 속도가 하도 빨라서 소프트웨어가 더욱 더 중요해진다”며 “컨텐츠의 양이 많아지면 이젠 또 질적인 면이 주목된다”고 전했다.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결국 그것을 만드는 것은 사람인데 무엇보다 작가의 ‘가치관’과 ‘관젼이 확고해야 좋은 창작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교육이나 시스템적인 면이 뒷받침되면 창작은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 학교, 사회의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부분이다. ▲ 창조의 고통은 표절로의 유혹이나 심지어 마약까지 이끌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조영현
한편, 이러한 창조를 위해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이 도움이 된다. 이 강사는 “창작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함께 필요한 것이 전문성과 아이디어인데 이것은 풍부한 소양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하지만 문(文)·사(史)·철(哲)이야말로 새로운 생각의 원천이요 씨앗이다. 「주몽」, 「황진이」 등의 드라마와 많은 영화들은 인문학적 소재에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고 서양의 많은 화가들은 그리스 신화의 장면들을 그려왔다. 애니매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등의 모티프를 일본의 고전과 문화사에서 많이 따온다. 이처럼 인문학은 문화에 없어서는 안 될 토양이다. 문화가 ‘공학’이라면 인문학은 그 배경이 되는 ‘기초과학’이다.

문화의 창작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괴테마저도 “남에게서 빌린 것을 빼면 내게 남은 것은 아주 조금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진정한 창의력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잘 이용하고 없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됐지만, 우리는 남이 떠놓은 물을 쉽게 쓰기보단 힘들어도 내 우물을 파야 한다. 창조의 고통을 느껴 본 사람만이 그 물의 시원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표절과 모방을 뛰어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할 때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