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큰사전 남측 편찬위원장 우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홍윤표 교수

 

지난 10월 9일은 북한이 지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힌 날이자 한글이 5백60번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5백60회 한글날. 전혀 접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두 세계 사이에 각각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 소식으로 세계가 시끄럽던 다음날, ‘겨레말 큰사전’의 남측 편찬 위원장이자 우리대학교에 재직 중인 홍윤표 교수(문과대·국어학)의 연구실을 찾았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이 아닌 책이 차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 거기에서 홍 교수는 한글로 디자인 된 넥타이를 매고 기자를 맞이했다.

겨레말 큰사전에 드리운 핵실험의 장막

겨레말 큰사전 사업은 지난 2005년 3월,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이 민족어 공동 사전 편찬을 위한 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을 가짐으로써 시작됐다. ‘우리 겨레가 오랜 기간에 걸쳐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민족어 유산을 조사·발굴하여 총 집대성한 사전’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겨레말 큰사전은 단순히 남과 북의 통합을 꾀하는 것을 넘어서 대한민국 방방곡곡의 모든 언어 유산을 집대성하겠다는 큰 포부를 갖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 때문에 사전편찬사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우려에 대해 홍 교수는 “북한 핵실험은 사전편찬을 해나가는데 있어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니에요”라는 말로 담담히 답했다. “겨레말 큰사전 사업은 민간교류지요. 남북관계가 단절된다 해도 민간교류의 통로는 어떻게든 열리게 돼 있어요. 이념문제와 정치적 문제가 연관되지 않은 문화적 사업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2012년에 겨레말 큰사전 1권을 편찬하려 했다. 그런데 집필을 서두르자는 의견이 모아져 올해 12월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계획이었다. “남·북관계가 이렇게 긴장된 상태에서는 올해 계획한 일이 제대로 될지 불투명하네요”라 말하는 홍 교수의 얼굴엔 핵실험의 버섯구름으로 인해 남·북한의 문화적 교류가 자유로울 수 없게 된 안타까움이 있었다.

인연으로 지속된 북한어에 대한 관심

“아이스크림을 북한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홍 교수의 물음에 기자는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고 ‘얼음보숭이’라 당당하게 답했다. 그러나 홍 교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얼음보숭이라고 배웠겠죠. 왜냐면 북한쪽 사전에 그렇게 기술돼 있거든요. 그런데 전혀 아니에요. 북한의 대표적 식당인 옥류관에서는 얼음보숭이가 아닌 ‘아이스크림’을 줍니다. 북한 사람들도 아이스크림을 찾고요. 호텔에서는 ‘에스키모’라고 말하기도 해요. 아이스크림 상표였던 것이 대명사가 된 거죠.” 이어 홍 교수는 사전을 통해 북한어를 연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말한다. “우리나라 사전은 중앙어 중심으로 편찬되고 있어요. 북한도 마찬가지인 거죠. 그게 안타까운 언어학자들이 이번 기회에 한국의 모든 말을 담은 사전을 만들어 보자고 모이게 된겁니다.”
남한의 방언들을 연구하는 것도 쉬운 작업이 아닐 텐데, 어떻게 해서 북한의 방언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북한 사람과 접촉한 것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라며 홍 교수는 운을 뗀다. 남한과 북한은 한글 코드가 서로 다르다. 컴퓨터가 한글을 인식할 때는 한글을 숫자로 변환해 처리하는데, 북한 국가 규격과 남한의 한글 표준 규격이 다르기 때문에 남·북한 간의 정보 교환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정보화 시대의 큰 문제점이라 인식한 홍 교수는 1994년, 북한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 문영호 소장과 연변대학교 최희수 교수와 함께 남북한 한글 코드를 통일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셋 다 42년생 동갑으로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그 때의 기억이 홍 교수를 계속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 중 문영호 소장은 겨레말 큰사전 편찬도 함께 하고 있어요”라며 미소짓는 홍 교수. 한글에 대한 애정으로 얽힌 참으로 끈끈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문화로 인정받는 한글, 그 맥을 이어가기 위해

올해로 5백60회를 맞은 한글날 이야기로 소재가 넘어갔다. 김영삼 정권 시절부터 한글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홍 교수는 말한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이는 것에 대해서 홍 교수는 “현재 국경일을 보면 문화적 요소가 전혀 없어요. 한글날이 국경일이 된다는 것은 문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언어’라는 요소를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것이죠”라며 바람직한 현상임을 역설했다.
한글보다는 실용적인 외국어에 더 매달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생각을 묻자 “요즘 시대를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인문학도들의 위기예요”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인문학은 언제나 중요해요. 그런데 인문학도들이 너무 좁게만 생각함으로써 인문학의 가능성을 닫아두고 있는 셈이죠. 한글을 예로 들면 일반인들이 관심 있는 분야는 아무래도 어휘나 어원 쪽이겠지요. 그러나 어휘론 개설서나 어원론에 관련된 책은 시중에 겨우 두세권 나와 있을까 말까 합니다.” 즉, 일반인들이 관심 있는 분야를 개척할 생각은 않고 인문학을 좁게만 생각함으로써 일반인들과 인문학의 괴리를 만드는 것은 인문학도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최면을 걸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홍 교수는 인생관으로 삼아도 좋을 만한 한 문장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언어학자로서 정말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도 처음에는 국어국문과가 지망이 아니었단다. 국어학을 배우며 이 길이 자신의 적성이라 자기 최면을 걸며 믿은 결과였던 것이다. 겨레말 큰사전 편찬이 긴장된 남북관계를 극복하는 초석이 되길 바라며 책으로 가득 찬 그의 연구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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