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소록도. 그의 소설에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한센병 환자(아래 한센인)들의 애환이 잘 그려져 있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에 소록도를 검색하면 소록도는 대개 관광지로 소개되고, 그 안에 한센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곁가지로 들어가 있을 뿐이다. 올해는 국립소록도병원(아래 병원)이 개원한지 9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8월 31일 기자는 90주년을 맞아 소록도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섬으로 떠났다.

작은 사슴을 닮은 섬, 소록도에 도착하다

 전남 고흥군의 녹동항에서 15분 간격으로 왕복하는 작은 배를 타고 5분이면 도착하는 소록도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제1구역은 직원들이 살고 있는 관사로서 일반인들도 출입이 가능하다. 제2구역은 병사지대로 한센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길을 계속 걷다가 병원이 어디인지를 몰라 길가에 있던 마을주민에게 길을 물었다. 한센병의 흔적으로 다리가 불편해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던 노인은 우리가 학생기자의 신분을 밝히자 묻지도 않은 역경의 인생사를 풀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마을주민의 80%가 70세 이상이라고 한다. 30대는 단 두명. 과거 감염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는 지난 1965년 즈음에 문 닫은지 오래란다. 어르신은 한센병은 다 소멸됐다며, “아마 15년 내 끝나지 않을까 싶어”라고 그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는 지난 1961년에 발목에 물집이 잡히면서 한센병이 시작돼 이 섬에 오게 됐고, 중학교도 여기서 다녔다고 했다. “옛날에 오마도 간척 사업 때도 일했는데, 1년 일하고 간척지가 전라남도에게 넘어가버렸지. 얼마나 억울했나 몰라” 그는 소록도가 옛날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며, 지금은 마치 천국 같다고 했다.

쾌적하고도 인간적인 병원 환경  

 그의 안내로 도착한 병원은 우리가 흔히 가는 종합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한센병 진료뿐 아니라 안과, 정형외과, 비뇨기과 등 모든 분야의 진료 서비스가 제공됐고, 병원 내부는 매우 깔끔했다. 기자는 병원 서무계에 근무하는 김광문씨를 따라 병원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들어간 병실은 거동 자체가 불가능한, 오로지 누워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김씨는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욕창이 생길 것 같지만, 워낙 환경이 쾌적해 그런 것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마침 식사시간이어서 환자인 할머니에게 숟가락으로 음식을 손수 떠주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비환자였다. 과거 병력자와 전염이 안된 이들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수탄장’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한달에 한번 얼굴만을 보던 것을 생각하면, 소록도가 상당히 많이 인간적으로 변모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피와 땀으로 점철됐던 그들의 손

 김씨는 이어 일제시기 탄압을 받았던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기자를 데려갔다. 바로 감금실과 검시실이었다. 감금실은 말 그대로 탈출을 감행한 환자, 혹은 일제가 소록도에까지 세워놓은 신사에 참배를 거부한 환자들을 감금하던 곳이었다. 감금이 끝나면 남자 환자들의 경우 검시실에서 단종을 당했다. “단종대에서는 정관수술을 했는데 전혀 마취 없이 이뤄졌고, 검시를 할때는 병원 시트도 제대로 깔지 않은 채 검시가 행해졌다”는 김씨의 말에서 그 잔혹했던 실상을 알 수 있었다. 감금실은 단칸방만한 네모난 공간이었는데 무려 서른 명 가량의 환자가 감금됐다고 한다. 지금은 바닥이 시멘트지만 당시는 모래알이어서 겨울이 되면 마치 바늘이 발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환자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화장실은 그 안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만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 마취없이 정관수술이 이뤄졌던 검사실 안의 단종대
지난 8월에는 생체실험의 증거들을 담은 사진(환자들의 장기, 태아를 보관하는 병들을 찍은 사진)이 공개돼 한차례 화제가 됐던 적도 있다. “환자분들이 제발 치워달라고 해서 96년에 철거했다”는 김씨의 말에서 환자들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 시기의 원생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4대 원장은 원생들을 시켜 벽돌을 굽고 자신의 동상을 짓고 건물을 만들게 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보통 ‘피와 땀을 흘린다’고 할 때 그건 비유에 지나지 않지만, 한센인은 손과 발이 실제로 썩어가고 있었기에 벽돌 공사를 하면 실제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일했다”라며 그는 당시 원생들이 얼마나 탄압에 시달렸는지를 이야기했다.
 병원과 중앙공원 사이의 자원봉사 회관 앞에서 기자는 노란색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버드대 4학년에 재학중이라는 전주영씨는 27일부터 와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전씨는 “주로 노인 환자분들의 식사 담당과 시트 정리, 간호사 보조, 환자분 목욕시키기 등의 일을 하고 있다”며 “신앙 등으로 삶의 이유를 찾은 분들은 그나마 낫지만, 그렇지 못한 분은 껍데기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봉사자로서의 마음을 토로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낙원, 소록도

 발병했을 때, 해부됐을 때, 화장됐을 때 이렇게 세 번 죽는다고까지 하는 한센병은 다행히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숙제는 남아 있다. 역사 속에 억울하게 묻힌 한센인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그것이다. 해방 후 병원 행정직원과 의사의 주도권 다툼 속에 무려 84명의 한센인이 직원에 의해 학살당한 ‘소록도 84인 학살사건’. 그리고 한센인이 직접 간척사업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 개입으로 말미암아 사업주체가 전라남도로 넘어갔던 ‘오마도 간척사업’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현재 이런 부분들에 대한 배상을 골자로 하는 한센인 특별법이 제정 중이다. 하루빨리 이 법안이 통과돼 고통 받던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속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한센인이 병이 낫는 그날이 오면 앞으로 소록도는 어떻게 변할까. 과거의 역사는 모두 잊혀진 채, 다만 하나의 관광지로서만 사람들에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에 김씨는 “한센인들이 모두 없어지더라도 사회에는 이들보다 더 소외받는 환자들이 많습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는 축적된 노하우가 있으므로, 앞으로 보건복지부와의 협의 아래 소록도가 우리 사회의 소외받는 환자들을 더 끌어안을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게 할 겁니다.”

 

/글 이지은 기자 superjlee2005@yonsei.ac.kr

/사진 유재동 기자 woodvi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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