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벼슬까지 제수받고, 국창의 칭호를 얻은 강산 박유전. 그는 대원군의 실각으로 남으로 내려가 나주에서 판소리를 하던 정재근에게 소리를 전수한다. 이는 조카인 송계 정응민에게 차례로 내려오면서 강산제를 바탕으로 비로소 서편제 보성소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끝없는 녹차밭에서 쉼 없이 생산되는 보성녹차.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성에 대한 단상이다. 하지만 이곳은 보성소리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알게 모르게 묻어있는 소리꾼들의 발자취가 이를 증명한다. 지난 여름 끝자락, 이 고장 사람들 저마다가 품고 있는 추억의 한 소절을 들어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보성소리의 오래된 자취를 찾아서

보성소리의 시조인 박유전(1835~1906)의 흔적을 찾고자 강산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강산마을이라믄, 웃강산이여, 아랫강산이여?”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버스기사의 난데없는 물음. 두 강산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기에 당황하던 차, 마을사람의 도움으로 아랫 강산마을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바 상대 마을이 박유전의 고적지임을 억지로 주장해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 강산마을에 모셔진 박유전 예적비

강산마을에서 그의 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단지 구전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댕겼었더라고”, “죽기 전에 바우에 앉아서 내 소릴 받아가라고 했지라”. 그러나 마을사람의 인도로 찾아간 뒷산의 한 평 남짓한 바위에는 수풀이 우거져 옛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사람들은 그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서편제 개막식을 먼저 떠올린다. “관광버스로 서편제 제자들이 많이 왔쟤. 큰 바우에서 조상현이도 소리를 했더라.” 강산마을 토박이 이영배씨(65)는 당시를 회상한다. 그 때의 개막식으로 마을에는 박유전 예적비가 세워졌다. 강산제의 창시자이자 한평생 소리만을 위해 살았던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세월을 따라 소리는 깊어가고

유능한 명창이 되려면 반드시 득음의 경지를 넘어서야 한다. 득음은 ‘판소리에서 필요로 하는 음색과 여러 가지 발성의 기교를 습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판소리는 쉰 목소리로 부르기 때문에 시작하려는 사람은 목소리를 거칠고 탁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리꾼은 목이 붓고, 마침내 터져 흉터투성이가 될 때까지 성대에 무리를 가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 득음정에는 오랫동안 이곳을 거쳐간 많은 소리꾼들의 혼이 스며들어 있다.

득음폭포와 득음정은 이를 위해 정응민(1896~1964)을 비롯한 수많은 소리꾼이 훈련하던 장소다. ‘소리의 공연과 연습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불갗라는 입구의 알림글부터 일순 그 의미를 짐작케 한다. 푸르디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득음정에 오르면 굽이굽이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폭포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거침없이 내리치는 물줄기의 시원한 기운은 정자에까지 살갑게 와닿았다. “물소리를 내 목청으로 이긴다는 신념에서 목을 쓰게 되믄 는다 이거지. 목청을 쓰기 위해서 폭포수 밑에서 하는 것이여.” 어느 마을사람은 이렇게 전한다. 이처럼 목을 트고 창을 가다듬으려는 사람으로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소리가 울려 퍼졌으리라.

그 곳을 벗어나 좁은 아스팔트길을 꾸준히 걷다보면 이내 도강마을에 다다른다. 보성소리의 큰 스승이라 불리는 정응민. 그는 스승인 박유전이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끊자 낙향, 명창들과 명창 지망생들에게 소리공부를 가르쳤다. 당시 조용했던 마을이 소문을 듣고 몰려온 소리꾼들에 의해 들끓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현재 무형 문화제로 지정돼 보성소리의 맥을 이어가는 국창 조상현씨도 있었다.

▲ 소리의 중심지, 정응민 예적지

정응민 예적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듯 조용했다. 초당에 들어서자 보성소리의 탄생을 알리는 비석과 돌계단 위로 단아한 기와집이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인자 바우를 북채로 뚜들면서 연습을 했는데 북신이 들려갖고 안쳐도 소리가 났으. 북바우라고 통상 그랬지라.” 장장주씨(69)는 이 바위에 담긴 내력을 설명한다. 기와집의 문은 굳게 닫혔으나 북장단에 맞춰 피가 쏟아지도록 소리를 하던 누군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멀리 밖으로는 넓게 펼쳐진 논 뒤로 깊은 산자락이 내려다보이고.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즈게 가게 아저씨가 한 소리 한다지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따라 찾아간 가게 앞에는 동네사람들이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중이다. 가게 주인인 장장주씨도 바로 그 무리에 있었다. 이 마을에 태어나서 정응민이 세상을 뜰 때까지 같이 생활했기에 북도 치고 소리도 한다는 장씨. 그는 보성소리를 “얼른 말해서 애절하고 한맺힌 소리로 이어나가기 때문에 여성소리”라고 말한다.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로 나뉘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 유독 심청가와 잘 어울림은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구슬픈 소리 때문이다. 덧붙여 스스로를 판소리보존협회 회장이라 소개하며, 서편제보성소리전수관(아래 소리전수관)으로 한번 찾아올 것을 당부했다.

▲ 판소리는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

후세로 전수되는 보성소리의 맥

보성읍내에 위치한 소리전수관에서 장씨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오늘은 ‘2006학년도 하계 보성판소리 교실’의 기초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아직은 수업시작 전이라 9살 혹은 10살 남짓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장내를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판소리를 배우는 것이 어떠냐는 물음에 주저없이 “재밌어요!”라고 답하는 아이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어떤 아이는 아리랑을 부르며 돌아다닌다. 곧 선생님이 들어오자 12명의 아이들은 북과 북채를 가지고 얼른 자리를 잡았다. “자, 맨 먼지 고법을 한 번하고 소리를 한다. 하나, 둘, 서이, 너이. 너무 빠르다 그랬어. 한 배가 빠르잖으.” 본격적으로 춘향가, 쑥대머리, 아리랑, 그리고 사랑가로 이어진다. “사랑~ 사라아앙~ 내에~ 사라앙아~” 아이들은 한소절 한소절 열심히 따라한다. 돌 위에 앉아 자신의 소리를 받아가라던 박유전. 보성소리는 지금도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계속 전승되고 있었다.

오는 21일부터 이틀간 소리전수관에서는 보성소리 축제(http://www.boseong.go.kr/sori-fastival)가 열린다. 보성소리의 계승과 대중화를 위해 시작돼 어느덧 9회를 맞이한 축제. 시간이 있다면 소리를 찾아 보성으로 떠나보자. 그리고 명창들의 곰삭은 소리에 귀기울여보자. 기쁨부터 슬픔까지 세월담은 그들의 목소리가 침잠해있던 당신의 감정을 씻어줄 테니까.

▲ 희로애락의 소리를 찾아 보성으로 오세요!

/글 정석호 기자 choco0214@

/사진 송은석 기자, 윤영필 기자 holin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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