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인들의 영원한 선배,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서...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듣던, 육첩방의 나라 일본
‘同志社’
일본의 경주라 불리는 교토. 그곳에 위치한 도시샤 대학은 윤동주가 일본에 와서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장소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반년 만에 도시샤대로 전학했다. 도시샤대는 기독교, 자유주의,
국제주의의 3가지 이념에 바탕을 두고 창립된 학교로 1875년 니지마 조에 의해 설립된 일본 최초의 기독교 학교다. 명동학교, 은진중,
평양숭실중, 연희전문, 릿쿄, 도시샤…윤동주가 거쳐 간 이 학교들은 모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세워진 미션 스쿨이다. 윤동주가 도시샤대를 선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캠퍼스 안에는 도시샤대 교우회 코리아클럽에서 세운 윤동주 시비가 위치해 있으며, 작년에는 정지용 시비가 윤동주
시비 오른편에 나란히 세워졌다. 도시샤대 유학생별과에서 외국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사오 치토세(44)씨는 “윤동주의 존재에 대해 그전에는
잘 몰랐으나, 도시샤대에 오고 나서 시비가 있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해 알게 됐다”며 “한국학생들이 윤동주를 아느냐고 자주 물어보고 또 가르쳐
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해, 시비를 통해 윤동주를 접하는 일본인이 많음을 전했다.
또한 이 곳에 재학 중인 다까미자와
유스케씨(경제?03)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헌화하는 것을 많이 봤다”며 “평소 친한 한국인 유학생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윤동주의
사진을 자주 봤다”는 말로 윤동주를 알게 된 계기를 밝혔다.
도시샤를 뒤로 하고, 윤동주가 구금된 장소로 알려지고 있는 시모가모(下鴨)
경찰서를 찾았다. 시모가모 경찰서는 도시샤대에서 도보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1923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1968년에 재건축이
이뤄져,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됐다고 한다. 경찰관에게 윤동주의 수감 기록 열람을 요청했으나 “2차 세계대전 때의 모든 기록은 말소되고 불타버려,
남아있지 않다”고 말해 아쉬움을 자아냈다.
시모가모 경찰서를 나와, 윤동주의 자취방이었던 다케다 아파트 터로 향했다. 현재는
교토예술조형대학이 들어서 있으며, 아파트는 남아 있지 않다. 도시샤대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은 굉장히 조용하고 한적한 주택가다. 지난
6월 23일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한 시비 제막식이 열렸고, 이 자리에는 윤동주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우리대학교 정창영
총장도 참석했다. 도시샤대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지 11년 만에 일본에 윤동주의 두 번째 시비가 선 것이다.
지난 8월 29일,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 유력 일간지에 윤동주 최후의 사진이 게재됐다. 교토 우지시 우지강변 아마가세 현수교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생전의 마지막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진을 찍고 그는 한 달 후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교토 남쪽에 위치한 우지(宇治)시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우지강과 녹차로 유명한 곳으로, 10엔짜리 동전 뒷면의 모델인 보도인(平等院) 또한 이곳에 위치해 있다. 우지역에서 내려 윤동주가 마지막 사진을
찍은 곳인 아마가세 현수교를 찾았으나 굉장히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현지 기온은 36도. 그 뿐이면 괜찮겠으나, 우지역에서 아마가세
현수교까지 가는 버스 구간은 이미 없어진 채였다.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꼬박 3시간을 걸어 도착한 아마가세 현수교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우지의 신록과 더불어 청청한 빛을 내고 있었다. ‘윤동주는 교토에서 왜 여기까지 와서 취재진들을 고생시키는지?’라는 원망과 함께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라는 의문이 동시에 든다.
윤동주는 징병 반대 운동을 벌이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된 후
후쿠오카 형무소에 넘겨진다. 그리고 조국 해방을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1945년 2월에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결국 일제는 평화를
사랑하는 순수한 젊은이의 영혼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아아, 젊음은 거기 오래 남아 있거라
지금 이 시간에도 윤동주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계속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그의 작품이 읽히고 있다. 일본의 한 교과서에서는 『서시』가 실리기도 했으며, 그를 추모하고 기념하는 사업은 외국에서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 기사에는 연희전문에서의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 중국, 일본 등 해외까지 다니면서 취재했던 기자가 정작 왜 가장 가까운 한국에서의 이야기는 빠뜨렸는지? 그 답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있다. 종합관을 오르는 도중 눈에 쉽게 띄는 윤동주 시비에는 꽃 한 송이 꽂혀 있지 않다.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묵념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장면 그릇은 눈을 씻지 않아도 눈에 박힌다. 교직원 식당의 존재는 ‘대부분’의 연세인들이 알고 있지만, 바로 왼편에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연세인이 모른다. 그 곳이 예전 윤동주가 살던 기숙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연세인은 드물 정도다. 이 기사는 여기에서 마무리되지만, 윤동주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이야기들은 윤동주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채워져 나가야 한다. 윤동주의 이름은 연세에 있을 때 가장 빛났고, 지금도 연세를 빛내고 있다. 그 빛을 지속시키고 더해나가는 것은 바로 후배들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