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을 추리하는 법의학의 세계

▲ 법의학을 통해 사건해결의 중요한 단서를 잡을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조영현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미 법의학자 마이클 베이든은 그의 책에서 ‘죽은 자들은 토크쇼 게스트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베이든은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재주라도 있는 걸까? 그렇진 않다. 죽은 사람은 분명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을 하진 않는다. 다만 법의학자라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온몸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할 뿐이다. 

법의학, 범죄수사의 나침반

법의학하면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외화시리즈 『CSI 과학수사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CSI 과학수사대의 요원들은 법의학자들이라기보다 법과학자들에 가깝다. ‘법과학’은 한마디로 범죄사실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과학정보를 제공하는 학문을 말하며 ‘법의학’은 사건해결에 필요한 의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학문이다. 즉, 법의학은 법과학의 한 분야인 것이다.
우리나라 법과학의 중심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가 있다. 국과수의 법의학부는 법의학과와 유전자분석과, 범죄심리과, 문서영상과로 나뉜다. 국과수의 한면수 유전자분석과장은 “그동안 강력범죄들의 해결에는 유전자 분석기술이 있었다”고 말했다. 얼마전 귀이개에서 유전자를 찾아 범인을 찾은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도 우리의 뛰어난 유전자 분석기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법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검시다. 시체를 검사하는 일을 의미하는 말인 검시는 시체의 외관만을 살피는 검안과 시체을 해부해 내부까지 관찰하는 부검으로 나눠진다. 검시는 주로 범죄와 관련되었거나, 그런 가능성이 있는 죽음, 또는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한 변사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우리나라는 국과수에서 이를 모두 담당하고 있다. 검시는 죽음의 원인을 찾아내어 사건의 수사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범죄수사에서 매우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검시의 중요성은 1987년에 있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살펴보면 더욱 절실히 알 수 있다. 당시 경찰에서 제시한 박 군의 사망원인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단순 쇼크사였다. 하지만 부검 후 목에 있는 물고문의 흔적을 보고 당시 국과수 법의학과장이었던 황적준 박사가 진실을 폭로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됐다. 이처럼 사건 해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검시지만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변사사건 6만 여건 중 검시가 이뤄지는 것은 단 10%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우리나라 법의학 제도의 한계

변사체 부검율이 30~50%에 이르는  미국과 유럽에 비해 우리나라의 부검율이 낮은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법의학자에게 수사권이 없어 부검 필요성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는 법의관이 현장을 조사하고 부검 여부를 판단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엔 경찰이 사건을 조사해 보고하면 담당검사가 부검의 필요성 여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면 부검을 하지 못하고 넘어가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 검사가 판사로부터 시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야 비로소 시체는 국과수로 운반돼 부검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보통 이틀이 걸린다. 때문에 그 동안 냉동 보관된 시체에서 사망추정시간 같은 정보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단서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으로는 경찰서에 법의학자를 한두 명씩 배치하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법의학자들이 사건현장에 직접 나가서 감식반이 놓치기 쉬운 단서들도 잡아낼 수 있고 바로 부검 필요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법의학자가 40여 명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이런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 문제는 법의학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법의학자는 해부병리학 전공으로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의사이지만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비슷한 연차의 의사에 비해 절반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더욱이 해부병리학과를 전공하는 사람도 정원의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 서울법의학연구소의 한길로 의학박사는 “의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법의학 특강을 하다보면 한 학년에 2-3명씩은 법의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법의학자가 일할 수 있는 경로가 국과수 아니면 법의학 연구소 정도밖에 마련돼 있지 않다”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기에 앞서 국가적으로 법의학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제도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검은 곧 인권’이라는 사명감

시체를 부검하여 사망원인을 결정하고 증거물을 확보하는 일 등은 역시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업무다. 이에 한 박사는 “부패가스로 인해 팽팽해지고 적혈구가 가라앉아 거무스름해진 시체를 부검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처음엔 자신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익숙해지게 되어있다”며 “법의학자는 사망자의 죽음 앞에 서있는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또 법의학자들은 부검을 마치고 시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리하고 얻은 결과를 논리적으로 담아 감정서를 작성하는데 이것은 살인사건 같은 경우 재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잘못된 감정서는 결백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신중함과 책임감을 요한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때문에 감정서 작성이 몇 달씩 걸리는 수도 있다고 한다. ‘부검은 곧 인권’이라는 말은 이러한 법의학자들의 깊은 사명감과 책임감에서 나온 말이리라.

고독한, 그러나 특별한

지금까지 살펴본 법의학과 법의학자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봐왔던 영화나 드라마 속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그럴싸하게 포장된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나라 법의학의 문제점과 법의학자들이 겪는 어려움들은 가려져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은 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법의학자들의 노력은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 속 이미지보다 아름울 것이다.    

  / 장지현 기자 zzangjj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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