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학내 문제를 수면위로 올려 이슈화할 수 있다는 것은 기획취재부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자부심이다. 부 특성상 민감한 사안에 대해 비판할 일이 많았고, 기사를 하나씩 내보내면서 학내에 적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 같아 부담스럽고 겁이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에게 부담을 주고 겁먹게 만드는 것은 바로 기사의 방향까지 규정해버리는 ‘3주체’와 ‘중립’이라는 장애요소다.

   

「연세춘추」는 학생들만을 위한 신문이 아니다. 학교본부의 기관지는 더더욱 아니다. 학교본부·학생·교직원이라는 ‘3주체’를 고려해 기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본질을 파악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 「연세춘추」가 추구하는 바다. 그리고 기사를 통해 특정 주체를 대변하면 안된다.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3주체’와 ‘중립’ 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의 정의만큼 기사에 적용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지난 1544호 ‘'행복plus', 갈수록 고민만 plus?’기사를 쓰면서 나는 기자로서의 판단이나 취재 결과보다는 ‘중립’과 ‘3주체’에 집착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세춘추」를 만들어가는 기자로서 독자인 학생·교직원·학교본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독자들로부터 “연세춘추는 학교본부를 대변하는 ‘입’이지 연세사회의 신문이 아니다”, “이제는 「연세춘추」가 소위 말하는 총학의 ‘빠순이·빠돌이’가 됐다” 등의 비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여론을 의식을 하고 기사를 쓸 때는 수위를 조절했다. 1544호 총학의 교육투쟁에 관한 기사를 쓸 때도 그 당시 나돌았던 ‘「연세춘추」는 총학의 ‘빠돌이’’라는 소문을 의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취재를 마치고 초고를 쓸 때까지는 오랜 본관점거를 만들어낸 학교본부의 일방적 등록금 인상과 뒤따르는 무관심이 기사의 주를 이뤘다. 취재 중 총학의 문제를 크게 찾지 못해 기사에서 총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기사를 한번 수정하고 두번 수정하면서 학교본부의 문제와 총학의 문제가 불필요한 균형을 맞춰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면에 실릴 때, 취재를 하고 분석을 한 것에 대한 분명한 결과나 입장이 없는 ‘그저그런 기사’가 돼버렸다.


기자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결코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된다. 풋내기기자인 내게 ‘소통’과 ‘타협’의 관계만큼이나 ‘진실’과 ‘중립’은 어려운 문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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