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온갖 정성을 기울인 한 편의 ‘낙서’를 보는 듯했다’ 어린 시절 내 눈으로 피카소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가 떠올랐다. 큰 눈과 굵은 선, 그리고 제목을 일러주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그림.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고 말하는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전시장에 들어섰다.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파격적인 그림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다. 무려 백 여년 전,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것을 최선으로 삼는 조류에 반항이라도 하듯 어린아이도 그릴 법한 그림을 작품이랍시고 내놓은 용기. 왜 괴짜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이해가 간다.

▲ 「거울 앞의 잠자는 여인」 /「한국일보」자료사진

한 발자국 다가가서 보고,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서서 그의 작품을 바라본다. 점점 그의 작품이 선사하는 이야기 속에 빠져 들고, 보면 볼수록 그의 그림은 생각보다 그리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이 뻗어나가는 수많은 붓의 흔적들. 「거울 앞의 잠자는 여인」에서 부드러운 여성의 몸을 직선으로 단순화시키기 쉽지 않았을 것이고, 어여쁜 아가씨들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그리는 것 또한 그랬을 것이다. 당시 피카소는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피카소스러운’ 것에 광적으로 빠져들었던 게 아닐까.

전시장에 붐비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피카소만큼 그림에 대해 엄청난 열정을 가졌던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아무도 사주지 않는 그림을 잔뜩 그려 푼돈에 팔고 동생에게 돈을 얻어 생활했다고 한다. 사후에 그의 그림은 최고의 예술품으로 인정받아 수 천만불짜리 가치를 가지는 그림이 됐다. 당시에는 졸작으로 치부되던 그림이 뭇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예술작품이 됐는데 처음 그렸을 때 없었던 예술성이 갑자기 그림 안에서 폭발한 것인가?

피카소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려도 그가 무명이라면 그 그림은 아마 무시당하는 것이 십중팔구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그림을 피카소가 그렸고, 만약 그 밑에 수백억원짜리라고 명시해둔다면 ‘역시 뭔가 다른데…’라며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단지 그림 어딘가에 쓰인 ‘Picasso’라는 서명만이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대개의 사람들은 그림보다 그린 사람의 명성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의 시기를 거듭한 끝에 피카소라는 브랜드가 태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두고 감상하고 후대에 물려주며 ‘명작’으로 분류했다. 시대와 사상을 초월해서 배워야할 점을 지닌 작품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미술가와 모델」이 예술적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 왜 이름난 작품인지.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지켜나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고전의 대열에 서야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피카소의 어느 작품에 9백66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가격이 부여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에 집착하기보다 단지 그림과 나 둘만의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피카소 전시회에서 그와 감정을 공유해 보는 건 어떨지. 오는 9월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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