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청와대 김만수 대변인은…”
뉴스에서 이러한 기자의 멘트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1984년에 우리대학교 사회학과를 입학했으며, 1988년 25대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까지 역임한 김만수 동문은 지난 2005년 3월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대변인(춘추관장)을 맡아 대통령과 언론 사이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학생 김만수, 사회운동에서 로맨스까지

▲ 꿈은 이루어진다 /유재동기자 woodvil@
우리대학교 사회학과에 진학한 이유에 대해 묻자 김 동문은 “고등학생과 재수생 시절 사회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고, 사회학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가장 다양한 논의전개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런 거창한 뜻을 품고 대학에 진학했으니 ‘대학에 입학해서는 어떻게 지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김 동문은 ‘데모밖에 한 기억이 없다’고 얘기했다. 그는 당시의 사회분위기상 사회학과 신입생 1백4명 중 8~90명은 데모에 참가했다며 “데모를 안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이처럼 데모에 계속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4학년이었던 지난 1987년, ‘구국학생동맹 조직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이 있기 직전에 6월항쟁이 일어나 학생운동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이 우호적으로 변했고, 김 동문은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을 그는 ‘운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생각해보니 그때는 어차피 들어갔다 금방 나오던 시절이었다”고 장난스레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총학생회장에 대한 화두를 건네자 그는 신나게 얘기를 풀어놓았다. 지난 1988년 정명수 동문(천문·85)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부총학생회장에 당선됐던 김 동문은 당시 남북 학생간 교류를 주요 공약으로 하며 총학생회 아래에 ‘통일촉진위원회’를 두는 등 반미자주화 통일운동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김  동문은 “학생회관에 민주투쟁을 나타내는 벽화를 그리려다 이를 막으려는 안기부 측과 마찰을 빚은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했다.

사실 그의 대학시절에는 그의 아내이자 1989년 2대 총여학생회장이었던 현은희 동문(문정·85)과의 로맨스가 빠질 수 없다. 1988년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정 동문은 1대 총여학생회장인 이은희 동문(철학·85)과 결혼했으며, 정동문과 러닝메이트였던 김 동문은 2대 총여학생회장을 아내로 맞아 재미있게도 총학생회 대표들과 총여학생회 대표들끼리 맺어진 셈이 됐다. 이에 대해 그는 “부총학생회장 시절 아내가 총학 집행부의 간부여서 사귀게 됐고 그 인연으로 결혼까지 골인했다”며 “당시에는 주로 운동권 내부에서 생활하다 보니 만나는 사람이 한정돼 나와 같은 ‘동종교배’적 로맨스가 잦았다”고 얘기해 기자를 웃게 만들었다.

졸업 이후의 험난한, 그러나 지향점이 뚜렷했던 삶

부총학생회장 활동을 끝으로 학교를 졸업한 김 동문은 그후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졸업 이후 공장에 들어가 2년 정도 용접을 했다는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극복하려는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아 이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 노력했다”며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에 심취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 현실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이후 새로운 대안을 찾아 방황하는 과정에서 정치를 선택했다. 이에 대해 “당시는 정치가 사회의 가장 큰 힘이었고 사회를 바꾸려는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치를 선택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정치권에 입문한 김 동문은 2년동안 당시 민주당 원혜영 의원의 보좌관직에 있은 후 부천시의원을 거쳐 2001년 노무현 대선캠프에 참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이후 그는 17대 국회의원 부천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현재의 대변인 자리를 맡게 됐다.
대변인 직책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김 동문은 “대통령의 대변인이라는 직책은 말 한마디가 정책이 되기도 할 정도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매력적”이라며 “대통령의 의중을 오해의 소지없이 간결하게 정리해서 전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침소봉대·본말전도적 보도 등 왜곡되거나 매우 주관적인 보도가 많아 대변인의 역할이 쉽지가 않다며 그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어느날 산행을 하는데 장난조로 ‘선거가 너무 많아서 선거를 치를 때마다 중간평가라 하니 국정운영이 힘들다’고 말했더니 다음날 ‘김만수 대변인 개헌추진 시사’라는 제목으로 보도되더라”며 “역시 말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김 동문은 권위적이지 않고 허심탄회한 태도로 고민 많았던 대학시절과 지금까지의 삶을 털어놓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연애 이야기나 대변인에 대한 궁금증에 앞서 입 안에 씁쓸함이 돌았다. 이는 대학시절의 신념이 졸업 이후에도 자신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 김 동문의 삶을 보며 요즘의 대학문화에서 대학생들을 움직이는 ‘사회적 공익과 변화를 추구하는 신념’이 사라져 버린 점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아름답던 이상과 사랑으로 가득찼던 대학시절, 그리고 졸업이후 목표를 향해 내달렸던 그의 삶. 신념을 향한 치열함이 그를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오르게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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