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영어는 완전 네이티브 수준이겠는데?” 많은 이들이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하면 이러한 농을 던지곤 한다. 그럼 한국에서 20년 넘게 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다 손석희에 백지연이려고. 영어라면 혀도 자르고 ‘올드보이’ 양산하는 고시학원도 마다않는다는 요즘, 우리대학교처럼 잘 구비된 교환학생제도는 많은 대학생들에게 이모저모로 매혹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교환학생이란 풍운의 꿈을 안은 이들이 본인의 처지를 그토록 부러워하고 시샘도 하며 영어습득과 관련해 많은 질문을 한다.
확실히 우리대학교의 교환학생제도는 그 질과 양면에서 국내 최고를 달린다. 지난 2005년 10월 현재 세계 55개국 4백99개 대학과 교환협정을 맺고 있는 우리대학교는, 매년 두 차례에 걸쳐 4백여명이 넘는 학생들을 해외로 파견한다. 직접 교환이 맺어져있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수학한 과목은 모두 우리대학교 학점으로 인정되며, 수업이 우리대학교에 개설돼 있지 않은 경우에도 일반교양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게다가 학비는 이곳의 등록금으로 내고, 경우에 따라서 교환학교에서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돈을 버는 것도 가능하다. 괜히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어학연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연사 강력히 주장하겠다. 학년 초 조금씩만 공들여 학점과 토플의 도를 닦아 교환에 지원하라고.
나 역시 그런 ‘경제적인 마인드’로 교환 학생에 지원했다. 그리고는 오직 영어습득이라는 원대한 꿈에 불타, 책임과 의무라는 마음의 짐만을 가득 안은 채 무겁게 타향길에 올랐다.
하지만 도착한 땅에서 내가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생소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이었다. 사실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아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름 별다른 고생 없이 “곱게 자란 딸”이었던 나는, 말은 물론 어떨 때는 생각마저 통하지 않는 파란 눈, 노란 머리의 아이들과 매일 부대껴야했다. 그에 더해 예전에는 내가 손대지 않아도 됐던 빨래, 청소, 요리 등과 같은 많은 일들이 일상의 의무가 됐고 굉장히 다른 삶의 모습과 문화에까지 부딪히며 나 자신을 부단히 재사회화시켜야 했다.
단순히 영어에 대한 버거운 짐을 덜고 갈 생각이었던 나에게, 이렇듯 전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경험은 사실 굉장히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나를 가둬뒀던 좁은 세상에서 나오자 내 위칟능력·미래가 넓은 좌표에 드러났고, 다른 사분면에 자리한 다양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과 나 자신을 보다 공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친구와 인간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수 있는 계기도 되었는데, 특히 그곳에서 새로이 만난 세계 속의 한국인들과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은 바벨론 이전으로 돌아가 오직 숨쉬고 소통하는 인간으로서 맺는 가장 순수한 관계로서의 친구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금 깨우쳐줬다.
교환학생 동안의 즐거웠던 기억을 모두 되짚어 보기에, 나에게 할당된 이 지면은 너무도 좁다. 그저 한 가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지난 1년이 내 인생에 있어 정말 값지게 추억될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난 영어의 버거운 짐은 그곳에 내려놓고 가볍지만 알차고 따뜻한 기억과 깨달음의 상자를 한 아름 가득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직전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미국 친구들이 나를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 식사자리에서 친구들은, “한국인 친구를 하나 알고 있다”며 자랑할 수 있게 해준 나에게 고맙다며 박수를 쳐줬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받은 만큼, 나도 작으나마 다시 없을 선물 하나를 주고 가는구나. 나에게 1년의 교환파견은 그런 의미였다. 말로 할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의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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