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석학 화학과 김동호 교수

흔히 우리들은 매우 짧은 시간을 일컫는 말로 “찰나의 순간”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찰나(1/75초)’는 눈 깜짝할 사이를  나타내는 불교 용어로, 인간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순간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짧은 1조·1천조분의 1초의 시간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대학교 김동호 교수(이과대·레이저분광학)다.

분자 속 신비를 밝히는 국가의 석학

▲ 김 교수는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연구내용을 처음 듣는이도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해줬다. /조진옥 기자 gyojujinox@yonsei.ac.kr
지난 2월 김 교수는 피코초(1/1조 1초), 펨토초(1/1천조 1초) 사이에 일어나는 분자내 초고속 현상을 레이저 광학 기술을 통해 규명,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국과학상’을 수상했다. 이어 교육인적자원부와 학술진흥재단이 논문의 피인용수와 학계에 미친 영향력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국가석학교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쾌거에 대해 김 교수는 “받기 힘든 상을 잇달아 받게 돼 무엇보다 기쁘지만 나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분들이 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김 교수의 주요 연구 분야는 ‘초고속 현상 측정’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최단의 시간은 16분의 1초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화학의 주요 연구 대상인 분자나 원자의 운동은 피코초와 펨토초처럼 짧은 시간 내에 발생한다. 

김 교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물의 전자 분해를 예로 들었다. 물 분자에 전류를 통하면 전자를 공유하며 결합하고 있던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 간 결합 관계가 깨진다. 이후 산소 원자나 수소 원자는 자기들끼리 결합해 각각 산소 분자와 수소 분자가 된다. 김 교수는 “이 때 원자들 간의 결합 관계가 깨지는 것과 분해된 이후 자기들끼리 결합하는 현상은 피코초나 펨토초 범위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김 교수의 연구는 황무지에 가까웠던 우리나라의 초고속 현상 측정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천조분의 비밀

피코초와 펨토초 범위에서 벌어지는 분자나 원자의 운동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장비와 기술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김 교수는 ‘초고속 레이저 분광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레이저는 자연의 빛과 달리 파장도 균일하고 직진성도 뛰어나며, 매우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는 펄스(pulse)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활용해 어떤 분자에 레이저 펄스를 보내 활동을 개시하게 한 뒤 또 다시 레이저 펄스를 보내 이 분자가 흡수, 방출하는 빛을 측정하면 분자의 활동을 초고속으로 측정할 수 있다.

이러한 김 교수의 연구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나노 기술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세한 입자들에 의해 펼져지는 현상들을 단순히 측정하고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특성을 물리적·화학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반도체를 예로 들며 “특히 반도체와 같은 기억 저장 소자의 경우 빛이나 전자의 이동처럼 빠른 시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를 저장,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며 “나노 단위의 입자들의 활동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고 이를 포착한 이번 연구는 그러한 부분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 김 교수는 “우선 그동안의 기존 연구들을 심화하는 한편, 이를 응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지금의 연구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발생하는 분자의 여러 현상들을 규명하고 원인을 밝히는 한편, 새로운 관측 기술의 개발이나 응용 기술의 개발 등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로서의 외길

김 교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연구를 진행하다 지난 1997년 ‘제1회 창의연구진흥사업’에 선정돼 ‘초고속 광물성제어연구단’을 유치하고 그로부터 3년 뒤, 우리대학교 교수로 초빙됐다. 이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속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6년 만에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김 교수는 미래사회는 ‘전문가의 시대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최고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이공계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확신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대신, 4년 동안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이공계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어느덧 화학과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됐다는 김동호 교수. 하지만 그에게서는 이미 ‘인간의 시간’을 넘은 열정과 패기가 느껴졌다. 앞으로 김 교수의 연구가 지금 당도한 1천조분의 시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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