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멀찍이 떨어져있지만 사람과 자연의
꾸밈없는 훈훈함에 친밀감이 벅차오르는 곳이 있다. 딱딱한 건물들과 낯선 얼굴들의 틈에서 지친 이에게 쏘여진 한줄기 봄볕은 어딘지 모르게 남도와
닮아있다. 겨울에도 어린 보리들로 늘 푸른 빛을 띄는 남도의 섬들. 섬인데도 차마 모질지 못한 바람결을 타고 이른 봄의 색깔이 짙은 남도로 훌쩍
떠나보자. 그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화 공간도 발견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서울에서 해남은 다섯 시간 남짓 걸린다지만 이 말만 듣고는 그곳의 위치가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각종 근심
걱정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 덧 창밖으로 보이는 완만한 능선이 남쪽에 가까워짐을 알려왔다. 버스가 남으로 더 깊숙이 내려가기를 기다려
드디어 해남에 당도했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열을 올렸던 이유를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질박한 황토와 봄을 재촉하는 따스한
겨울비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준다.
‘고산 윤선도’ 이 다섯 글자를 들으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를 떠올린다. 그의 은둔지
보길도까지 기억한다면 당신은 아마 훌륭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목 놓아 노래한 자연의 실제 모습과 그 뒷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고전이라 어렵게만 여기는 고산의 시는 그 시대의 대중 가요였으며, 그는 지조를 중시하는 사대부이기 이전에 노래를
짓고 풍류를 좋아한 문화인이었다는 것, 기자 또한 남도를 다녀온 뒤에야 새삼 느끼게 됐으니...
보길도. 이는 고산이 제2의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는 왜 뭍에서 뚝 떨어진 그 섬에서 머물렀을까? 예로부터 섬을 천간이라 여기고, 육지를 민간과 세속이라 여겼다는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이런 추측 속에 보길도행 배에 올랐다. ‘관직의 미련을 버린 고산은 제주도로 은둔하려던 길에 발견한 보길도에 머물렀다’는 설명에 보길도에 대한
기대는 커져만 간다. 혼인 첫날 밤 신랑 얼굴을 처음 보는 새색시처럼 가득 찬 설렘을 안고 배는 부두에 정박했다.
안개 낀 하늘과 하나가 된 초록빛 바다를 향한 구부정한 길은 부두에서 ‘부용동’ 초입으로 우리를 데려다 줬다.
고산의 인공 정원 중 가장 유명한 곳, 세연정이 눈앞에 펼쳐진다. 잔잔한 연못의 수면과 소슬거리는 나무 사이를 헤매는 바람 속에서는 시가 나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고요한 수면에 비친 풍광에는 늘 그 곁을 맴도는 사철나무와 각양각색의 재미난 바위가 담겨있다. 혹시 뛸지 모른다고 지은
혹약암, 활쏘는 무사를 닮은 사투암 등 바위에게 꼭 맞는 애칭을 붙인 그의 섬세함에 미소가 번진다. 잠시 숨을 돌려 들른 세연정의 근처 고산
윤선도 문학체험관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른다. 돌길을 따라 걸으며 어부 사시가 40수 한 수 한 수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그가 본
것, 들은 것은 모두 시가 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장보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둥둥둥둥~ 쏴쏴~ 칼과 창이 부딪치듯 배의 엔진소리는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배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던 거품 물감은 초록빛 바다를 도화지삼아 매순간 그림을 다채롭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 흔적은 파도에 묻혀 사그라지고, 배는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가듯 섬과 부표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우리들을 목적지인 완도로 데려다 줬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부두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는 사람들을 시내로 부지런히 실어나른다. 수많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향하는 걸까. 그 중에는 세트장을 찾은 우리 일행도 포함돼 있었다. 시내에 막 도착한 우리는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드라마 『해신』의
신라방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얼마를 갔을까. 창 밖은 어느새 세트장을 알리는 붉은 깃발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나침반이 돼
우리를 안내했다.
장보고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신라 고유의 모습과 출세한 뒤 돌아와 꾸민 모습이 공존하며 시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청해진 포구마을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과 싸리나무로 빼곡히 채워진 울타리
안의 황토색 벽과 볏짚으로 씌워진 아담한 초가집은 고즈넉한 정취를 물씬 풍긴다. 군데군데 걸린 당시 촬영현장을 담은 스틸컷은 잠시 멈춰 서서
장면을 가늠해 보게 만들었다.
신라방의 시전이 그 당시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교역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포구마을의 저잣거리는 농기구, 짚신 등
신라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터전을 나타내고 있다. 그곳을 지나면 조금 전 초가집과는 사뭇 다른 무거운 기와를 짊어진 마을이 펼쳐진다. 특히 극중
장보고가 염장의 칼에 생애를 마친 본영은 그 중심에 위치하는데. 여전히 본영은 위엄을 뽐내며 소세포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산의 고택부터 보길도의 세연정과 동천석실 그리고 완도의 드라마 『해신』 세트장까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과거와 현재를 숨가쁘게 오갔다. 그리고 눈에 담았던 모든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다시 슬라이드처럼 넘어가며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폴더에 저장됐다.
시끌벅적한 서울에 머물러 거리를 외로이 거닐다보면, 간혹 그 때의 풍경과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만든다. 그 때가 그립게 느껴지는 건 아직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