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낙서를 왜 할까?

지난 1월 27일 여러 도형들과 뜻 모를 말들이 그려진 한 장의 낙서가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리던 스위스의 작은 도시 다보스를 뒤흔들었다.  이 낙서가 발견된 자리의 주인은 WEF에 참석한 한 거물급 인사였고, 언론들은 ‘가장 먼저’ 심리학자에 의뢰해 낙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블레어 총리의 낙서로 오인됐으나 빌게이츠 회장의 낙서로 밝혀진 메모 이 낙서에 따르면 이 인사는 ‘과대망상증’에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고,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려 불안정한 상태’이며 ‘지도자감이 아닌’ 인물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얼마 후 낙서의 주인이 다른 인물로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작은 ‘해프닝’으로 마무리 됐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낙서를 분석한 이들이 ‘심리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낙서의 주인으로 먼저 지목받은 사람은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였으나, 후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회장으로 밝혀졌다.) 인류의 역사와 고락을 함께 해온 낙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낙서를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왜 낙서를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지금까지도 인간이 낙서를 하는 이유에 대한 연구는 진행중이다. 하지만 위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심리학은 그 이유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대학교 심리학 박사인 한국청소년개발원 장근영 부연구위원을 만나 낙서에 관한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봤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내 교과서 속의 낙서, 왜 하는 걸까? 교과서, 수첩, 일기장에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한 경험이 다들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특별한 의미도 없고, 그렇다고 읽어 줄 사람도 없는 낙서를 우리는 왜 하는 것일까? 장 연구원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낙서를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이나 반복하는 행동’과 비슷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을 반복합니다. 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눈꺼풀이나 기도 같은 불수의근의 동작으로 나타나는 틱(Tic)장애(자신도 모르게 근육이 움직이는 현상) 같은 것이 있기도 하지만, 정상인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어떤 단어만을 중얼거리거나, 습관적으로 손바닥을 비비거나 발을 구르거나 하는 행동이 그렇습니다. 넓게 보자면 담배를 피는 행동도 포함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행동들은 보통 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을 때 종종 나타난다. 따라서 장 연구원은 이러한 행동들을 중추신경계가 긴장을 풀고 안정을 유지하려는 행동의 일종으로 추측했다. 그렇다면 하고 많은 행동들 중에 낙서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물론 ‘왜 하필 그 행동이냐?’ 라고 질문한다면, 그 사람의 독특한 개인적 경험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공장소에서의 낙서, 인간의 본능 우리대학교의 화장실에도, 강의실의 책상에도, 심지어 독일에 있는 베를린 장벽에서도 낙서는 빠지지 않고 발견된다. ‘누가 왔다간다’는 내용의 낙서부터 욕설, 또는 성적인 내용까지 공공장소에서의 낙서는 개인적인 차원의 낙서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공공장소의 낙서에 대해 장 연구원은 ‘개인들이 인터넷에 열광하는 이유’와 같다고 설명했다. /화장실 낙서, 개인의 내면이 드러나는 좋은 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남들의 주목을 받으려는 욕구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능입니다.

왜 사람들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안 써도 되는 댓글들을 남기고 안 만들어도 되는 홈페이지를 만드냐, 결국 자신을 드러내고 남들의 주목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사람들의 반응을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회수가 대표적인 확인 지표라 할 수 있겟죠.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합니다. 그때는 나름대로 타인의 주목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하죠.”

장 연구원은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가 화장실을 비롯한 공공장소의 낙서에서 투영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떠한 내용의 낙서를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또는 무엇에 억압돼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낙서처럼 사람들이 몰래 즐기는 것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性)적인 측면에서 억압돼 있는 사람은 주로 음란한 낙서를,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러한 편견이 드러나는 낙서를 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낙서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폭력적인 욕구를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낙서, 호모 루덴스(Homo Rudens)의 취미

하지만 최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동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낙서들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교과서의 과목명을 바꾸는 이른바 ‘교과서 튜닝’은 그 좋은 예다. 장 연구원은 이러한 문화의 배경을 ‘불일치의 원리(Incongruity Theories)’로 설명했다.

   
/불일치의 원리가 나타난 '교과서 튜닝'

“이름을 가지고 3행시를 지으면 색다른 재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푸: 푸우가 뭔지 아느냐? 우: 우루사다.’라는 2행시를 볼 때 사람들은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죠. 왜냐하면 원래 이름이 갖고 있는 뉘앙스와 2행시의 내용이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리학적 효과를 ‘불일치의 원리(Incongruity Theories)’라고 합니다.”

단어에 획 몇 개를 추가해 전혀 다른 단어를 만드는 낙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원래의 단어와, 획을 몇 개 추가함으로써 만들어진 완전히 다른 뜻의 단어가 만들어내는 부조화성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다. 장 연구원은 “원래 인간은 재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호모 루덴스(Homo Rudens)이며 이러한 특성은 인간이 끊임없이 발전해온 원동력”이라며 “낙서를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낙서의 의미를 표현했다.  

낙서, 음지에서 태어났으나 이제는 양지를 지향한다

낙서는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키고 억압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며 재미를 주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들 중의 하나’인 낙서. 하지만 인신공격과 같은 도가 지나친 낙서는 아무리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하더라도 여전한 ‘금기’이다. 자신이 낙서를 하는 이유를 곱씹고 도를 넘지 않으려는 모두의 노력, 이것이 낙서가 우리 시대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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