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면 어떤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해가 가까워지면서 봄꽃이 핀다. 연세 동산에도 자연이 있어서 그런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데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연만한 스승도 없다는 말도 있고 보면 우리 캠퍼스는 말 없는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은 그 스승이 아주 말이 없지는 않다. 다만 그 말이 우리 인간의 언어와는 무척 달라서 알아듣기 어려울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기는 아시다시피 칼 폰 프리쉬라는 학자는 40여년의 연구를 통하여 꿀벌이 인간 언어와는 많이 다르지만 체계 있는 고유의 의사 전달 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밝혀낸 바 있다. 자연의 언어를 이렇게 과학의 눈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문학의 마음으로 보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자연을 살아 숨쉬는 나무들이 기둥인 신성한 사원으로 묘사하고 거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혼돈의 언어가 흘러나온다고,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지날 때 가족을 보듯 친근한 눈으로 바라보는 상징의 숲이라고 적었다. 우리의 시인 김춘수는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지만 저 「꽃」에서 그저 하나의 미약한 움직임에 불과하던 자연의 일부가 이름을 불러주자 자신에게 와서 꽃이 된 사건을 적고 있다. 인간만이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연도 그런 의미가 될 수 있도록 호명되고 싶어 기다리고 있다는 직관을 우리의 애송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이라는 곳은 다시 주목해야 할 커뮤니케이션(소통)과 그 도구(언어)의 배움터다. 그 곳에서 우리는 우선 인간만이 언어를 지니고 있다는 우월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히려 인간 언어와는 다른 언어들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언어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간 언어의 우수성을 재확인할 수도 있으리라. 자연 속에서 우리는 또한 인간 언어가 다다를 수 없는 곳이 있다는 한계 체험을 하면서 언어적 겸손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시심(詩心)을 열고 산책을 하다보면 어느새 이런 생각에도 이를 것이다. 자연은 영원히 닫힌 곳이 아니며 언어의 장벽으로 유폐된 곳이어서, 부단한 길트기의 관심과 열정으로, 인간이 언어를 넘어서주기를 바라는 친구요 가족이라는.

   자연 속에서의 소통의 학습은 단순한 기술의 취득 과정이 아니라, 생명을 담고 있는 것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기에 더욱 유익하다. 나는 이 생명 학습 또는 자연과의 소통 능력의 함양이, 특히 날로 메마른 단자가 되어가는 듯한 오늘의 세대에게 종요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청맹과니가 되지 않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 프랑스의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는 “인간은 자연 속에 태어나지 않고 문화 속에 태어난다”고 썼다. 그 한 줄의 문장 속에서 문화를 언어로 보아도 무방하다면 “언어 속에 태어나는 인간은 언어를 넘어 자연에 왕래해야 한다”고 이어 말하고 싶다. 지난 겨울, 학교의 소나무를 듣는 언덕에는 눈이 며칠을 쌓여 있었고 청설모가 바쁘게 나무를 오갔다. 오늘은 봄의 전령이 그 자리에 머물다 갔으며 백양로로 이어지는 언덕길 끝 목련 나무에는 시린 연두의 봉오리가 한창이었다. 백양로를 따라 다시 올라오는 학생들에게, 이런 우리 학교 自然 선생의 근황 몇 편도,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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