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획

‘하동’하면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들이 있다.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와 박경리의 소설『토지』. 많은 도시들이 현대화된 지금도 우리들의 기억 속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곳. 아니, 어쩌면 그렇게 남아있어 주길 바라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봄에 다시 와요!” 『토지』의 무대, 평사리

바람이 몹시 불던 평사리에 도착했을 무렵, 머릿속으로 끊임없이『토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소설이었건, 드라마였건 간에 어떻게든 최 참판 일가와 마을 사람들의 삶을 찾아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드라마 촬영이 끝난 이후의 평사리는 몹시 고요했다. 맥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누런 곡식이 잔뜩 들어있어야 할 곳간에는 볏짚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카랑카랑한 서희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별당에는 꽃신만이 주춧돌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비가 오는 그 순간도 이곳에서는 영화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아직도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허탈감을 달랠 수 있었다.
“드라마 토지를 찍을 때만 해도 저어기 끝까지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많이 붐볐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은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손사래를 치시는 슈퍼마켓 주인 아주머니. “그래도 여기가 봄만 되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겨울에 와서 볼 게 없지요?” 겨울에 찾은 우리들이 안타까우셨는지 친절하게 평사리와 하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봄이 되면 다시 찾아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시던 아주머니의 애향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입 안 가득 구수함이 일품인 참게탕과 재첩국

“하동하면 뭐니뭐니해도 재첩국과 참게탕이죠.” 참게탕 전문점을 운영하시는 한선임씨(44)는 음식을 불 위에 올려놓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참게가 먹을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 데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다른 해산물처럼 양식을 할 수 없다는 것과 잡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죠. 거기서 오는 희소성이 가격을 결정하는 겁니다.” 또 다른 명물 재첩에 대해서도 한씨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섬진강의 재첩이 맛이 좋기로 유명한 이유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리적 특징 때문이란다. “재첩의 경우 흔히 국으로 끓여 먹지만 재첩 회무침과 회덮밥도 별미랍니다. 특히 재첩은 부추와 궁합이 잘 맞아서 요리할 때 부추를 꼭 넣죠. 아, 5가지 맛이 난다는 은어회도 유명해요. 지금은 제철이 아니지만 나중에 6월말~8월말쯤 꼭 드셔보세요!” 보글보글 끓어있는 참게탕 한 숟갈이 온 입안에 구수하게 퍼진다. 고향의 맛이 바로 이런 것일까?


송림공원의 잔잔함에 빠져버린 어느 아침.

토요일 아침의 송림공원은 잔잔히 깔린 백사장만큼이나 평온했다. 강가의 바람을 막을 목적으로 심어진 소나무 숲과 정돈된 공원,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강과 그 둘을 잇는 철교. 절경은 아니지만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는 소나무 껍질, 드넓은 백사장, 이렇게 소소한 것들이 눈길을 잡아끌더니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잠깐 동안 감상에 젖어 있는데, 어느새 발목까지 차오른 밀물에 놀라 발을 뺀다. 운동화가 다 젖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니...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처럼 알 수 없는 일이다.


왠지 모를 익숙함, 쌍계사

수능을 앞두고 항상 옆에 끼고 다녔던 국사책. 그 안의 수많은 탑과 비석은 항상 외워야하는 골칫덩어리였다. 쌍계사의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니 언젠가 한번 들어본 것도 같은 최치원의 진감선사 비문과 쌍계사 9층 석탑이 나타났다. “처음 오셨나요?” 지리산 환경안내원 이홍오씨(33)의 안내를 받으며 경내를 둘러봤다. 그에게 쌍계사만의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쌍계사 뒤쪽에 있는 산을 자세히 보면 그 높이들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울퉁불퉁함에도 불구하고 쌍계사의 기왓장 높이는 산보다 높지 않아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진이나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에 가장 안전한 구조라는 것도 자랑할 만합니다.” 사실 어찌 그것이 쌍계사만의 특징이겠냐 만은 이씨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 속의 쌍계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었다. 한창 공사 중인 대웅전 앞에서 약수를 마시다 스님들과 눈이 마주쳤다. 약간은 수줍은 듯한, 그러나 의연한 스님들의 눈빛이 그들이 지나간 후에도 한참 동안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인심도 같이 팔아요~ -화개장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로 향하면서 조영남의 노래를 내내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적거리는 장터의 모습을 기대했건만, 노래에 등장하는 ‘구례사람, 하동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있을 건 다 있다는 노랫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노래 속의 활기찬 화개장터를 그려본 초행길 손님들이 미안했을까? 헛개나무차를 대접하던 아주머니와 오랫동안 이곳을 지켜봐왔다는 할아버지는 화개장터의 오래 전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장터가 예전에는 저 다리를 건너서 아주 크게 열렸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시내에 있는 대형마트를 이용하면서 손님이 줄었다고. 화개장은 그저 특산물을 판매하는 역할만 하지만 찾는 이들은 늘 찾게 된다고 하셨다. 4월 벚꽃축제가 정말 멋지다며 ‘그 때 와야 되는데’하고 아쉬워하던 장터 사람들. 왠지 텅 비어보이던 화개장이 시장 사람들의 인심으로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사람 사는 맛이 이런 거라면... - 하동장

때마침 정월대보름을 맞이해, 좌판에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나와 계셨다. 누가 그랬던가. 여행지의 삶을 알아보고 싶다면 시장엘 가보라고. 하동장에는 시종일관 활기가 넘쳤다.
“이왕 찍는 거 아줌마처럼 나오게 말고, 예쁘게 좀 찍어주이소~” “아이고, 나 찍지 마래이~화장도 안 하고 나왔구만.” “내는 요 쪽이 더 예쁘게 나오니까 이리 와서 찍어줘요!” 멀리서 온 이방인에게 건네는 풋풋한 한마디들 덕분에 시나브로 하동장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든다. 왠지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서 함부로 사진을 찍으면 안 될 것 같아 쭈뼛쭈뼛하게 셔터를 누르는 기자에게 오히려 더 예쁘게 찍어달라고 성화인 아주머니들. 사람 사는 맛이 넘쳐나는 이곳이 바로 하동장이요, 이것이 우리의 인심어린 옛 모습이 아니겠는가?

섬진강 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은 비단 강물뿐만이 아니다. 인심도 같이 흐른다. 인심,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단한 힘을 지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하나만으로도 참게탕 이상의 포만감을 가져다주고, 이제는 한산한 장터를 채워주며,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도 쉽사리 발길을 돌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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