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타는 목마름으로」.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는 권력의 억압과 이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민중 사이의 투쟁으로 기억된다. 지난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아래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대항한 '부마민중항쟁'과 신군부에 저항한 '광주민주항쟁'. 87년 '6월 항쟁'까지. 위의 사례만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민주화의 역사는 민중들이 자신의 힘으로 독재 권력을 타도하고, 자유를 얻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독재 권력과 민중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이른바 '대중독재론'이 그것이다.

지난 2000년 새롭게 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대중독재론은 『대중독재』 2권의 출간고, 지난 11월 19일에 중앙대 문과대학에서 열렸던 '박정희 시대 재평가를 중심으로한 민주진보담론의 위기'를 주제로한 학술회의를 계기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다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독재

대중독재론은 '다수에 대한 폭력의 방법이 아닌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독재체제'를 뜻한다. 독재 권력은 단순히 대중을 억압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내부에 자발적인 동원 체제를 구축해 권력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이미 유럽 등지에서 대중독재론은 파시즘과 나치즘, 스탈린주의 등을 설명하는 데 하나의 이론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양대학교 비교문화역사연구소 원장인 임지현 교수가 박정희 정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중독재론을 제기했다.   

한국에 처름 대중독재론을 제기하고, 『대중독재』등을 집필하기도 한 임 교수는 "대중은 독재에 단순히 협조할 뿐만 아니라, 독재에 참여하여 소수를 억압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임 교수의 말대로, '대중독재'는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는 독재'로 작용한다.                                          

이러한 대중독재의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히틀러의 나치 정부는 국민들의 침묵과 동조 하에 소수자인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다. 이탈리아에서 철권을 휘둘렀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나, 소련에서 완고한 독재체제를 구축한 스탈린 정권 역시 독일의 경우와 같이 대중의 지지와 호응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이러한 양상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총력전을 강요했던 일본의 군부 정권 역시 그 밑바닥에 대중의 동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임 교수는 "독재 권력은 대중의 일상까지 그 영역을 넓히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고 지적한다. 히틀러가 자신의 정적들을 '네 자식들은 내 아래에 있다'며 비웃었던 것처럼, 독일의 소년소녀들은 학교 생활과 방과 후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치즘을 몸에 익혔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독재정권 페탱 정부는 자신들을 잔다르크와 동일시하며, 이러한 이미지를 대중의 일상에 심기 위해 애썼다.

대중독재와 박정희 정권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대중독재론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일까. 이는 박정희의 개발독재체제와 관련이 깊다. 박정희의 독재체제를 민중과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민중사관과는 달리, 대중독재론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체제 역시 대중의 호응과 지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임 교수는 "박정희가 1972년에 단행한 유신 체제가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이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대중독재의 의문점과 그 의미

대중독재론은 독재 권력과 당시 대중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독재론은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먼저 대중의 독재 권력에 순응하는 대중의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다. 대중독재론의 경우 독재에 대한 대중의 대응 태도를 '동조와 협력'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독재에 대응하는 대중의 태도가 '동조나 협력'이라기보다는 '침묵'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대중독재론의 사례가 대부분 유럽과 일부 동양 국가들에만 한정돼,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의 독재 구조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임 교수는 "아직까지 대중독재론이 시작단계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조 교수의 지적처럼 대중독재론이 독재를 변호하고 단순화한다는 비판도 있다. 임 교수는 "대중독재론은 단순히 독재 권력을 변호하거나, 혹은 대중을 단죄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독재에 동조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밝힘으로써,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일상 속의 독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독재의 탄생을 방지하는 데 있다"고 반박했다.              

이미 민주화가 실현된 현실에서, 대중독재론은 단순히 과거 사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을까. 이에 임 교수는 "제도적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히틀러 나치 정권이 민주주의 상태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대중독재의 잔재와 민족주의, 포퓰리즘 등이 결합해 새로운 대중독재가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중과 독재 권력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있는 대중독재론. 이는 단순히 과거를 설명한다는 의미를 넘어 민주화라는 덫 속에 숨어있는 우리 일상 속 파시즘과 독재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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