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국문과 강사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 수릉(壽陵)에 살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당시 빼어나기로 이름난 조(趙) 나라 한단(邯鄲)의 걸음걸이를 배우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가 밤낮으로 노력했는데, 끝내 실패하고 원래 걸음걸이마저 잊어 버린 채 기어서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 전하는 이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이야기는 흔히 분수를 모르는 태도를 경계하는 뜻으로 읽히지만, 서사 자체에 주목할 때 당대 주류적 흐름에 매혹당한 청년이 맹목적인 배움에 이끌려 애초의 존재 기반을 상실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극의 단초가 능력 이상의 것을 동경한 데 있기보다 자기 인식과 성찰 없이  시대 조류에 휩쓸린 데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한단의 걸음걸이도 자신에게는 무용할 수 있음을, 자신의 행복에는 무관심한 채 타인이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는 사이 ‘나’를 상실하는 실존적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들을 유혹하는 ‘걸음걸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기술이다. 행복을 보장하는 것으로 가정된 물적 소유의 확대와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 ․ 권력의 획득을 위해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경쟁의 학습은 학벌 사회의 구조 속에서 대학 입시를 기점으로 한 번 정점에 도달했다가 대학 교육을 통해 다시 가속화된다.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경쟁 시스템에 적응하여 승자가 되는 법을 체화하는 것 외에 다른 교육 목표나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위 21세기형 인재를 양산한다는 대학 교육 역시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밀도 높은 교육 철학과 내용을 마련하지 못하는 대학들은 이 ‘결핍’을 메우기 위해 학업 성적이 우수한(경쟁에 능숙한) 학생들을 선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우수한 학생을 (키우기보다는) 선발하여 이들을 다시 사회 적응력이 뛰어난(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잘 아는) 인재들로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곳이 ‘대학’인 것이다.

 경쟁에서 승자가 되는 ‘걸음걸이’를 배우려는 학생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원하는 수업을 듣고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졸업 후 진로에 유리한 학점을 얻기 위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경쟁한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을 모색하기 전에,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길인지 판단하기 전에 학생들은 불나방처럼 경쟁 시스템에 뛰어든다.

 그 사이 대학은 경쟁의 학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쉴새없이 학생들을 독려할 뿐 아니라 몸소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보여준다. 학벌 사회 구조에 편승하여 입시제도를 좌우함으로써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여 교육의 사회적 공공성보다 사적 소유와 재산권 행사에 치중함으로써 기득권을 지켜나간다. 학생들은, 적립금이 아무리 늘어나도 교육 기자재 확충이나 실질적인 강의 지원 확대에 무관심한 대학에서 사적 소유를 불려가는 법을 배우며 교육 내용보다 교육부 평가에 관심이 많은 대학에서 학문적 성취보다 학점 취득을 목표로 삼는다.  

 학생들은 이미 모두가 아름답다고 하는 걸음걸이가 내게도 아름다운 것인지, 내가 원하고 내게 필요한 걸음걸이가 무엇인지 묻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묻는 사이 어느 틈엔가 경쟁에서 도태되고 만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버린 맹목적인 배움이 스스로를 앉은뱅이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야 할 의무가 진정 대학에 없는 것일까. 마술피리를 부는 사나이처럼 대학이, 시대 조류에 휩쓸려 허위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기 쉬운 청년들을 끌고가는 곳이 행복의 길이라고 모두를 안심시켜도 좋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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