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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섹션] 근현대를 걸어온 여성-서양화가 나혜석
  • 최은영 기자
  • 승인 2005.11.07 00:00
  • 호수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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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윤심덕, 전혜린

근대 최초의 여성 서양화 화가, 연애 대장, 파격적인 ‘이혼 고백장’과 여성적 글쓰기, 떠돌이로 거리에서 맞은 죽음…. 드라마틱한 이 이야기는 정월 나혜석(1896~1948)의 삶이다. 흥미진진한 그녀의 삶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거렸고, 그 풍문은 아직까지도 떠돌아다닌다. 근래 들어 나혜석에 대한 평가가 높아져서 연구자들의 성과가 꾸준히 발표되고 기념사업회가 설립되며 정부의 ‘이 달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나혜석에 관한 단편적 지식들은 늘어만 가는 가운데, 우리는 그녀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화갗 나혜석임에도 불구하고 ‘화갗의 측면에서 그녀를 보는 작업은 이제껏 소홀히 해왔다는 평이다. 나혜석기념사업회 운영이사인 경원대 미술학과 윤범모 교수는 “‘최초’와 ‘여성’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기보다 이제는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전업 유화가로서 나혜석을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서울에서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개최하고 작품을 매매 하는 전업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비록 나혜석의 유화작품이 30~40점 밖에 되지 않아 연구하기에 어려움은 있지만, 보통 풍경화의 인상주의적 표현에서 그녀의 특징을 찾는다. 대표작으로는 <섣달 대목>, <무희>, <파리풍경> 등이 있다. 한편, <매일신보>에 실은 그녀의 만평은 평소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여성의 과중한 가사노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었다.


▲ 나혜석의 <자화상>
그렇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을 보인 것은 나혜석의 자유로운 연애와 파격적인 글쓰기였다. 유부남 최승구와의 일본 유학 시절 연애를 했지만 그와 곧 사별하게 된 나혜석은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한다. 그녀는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예술 활동을 보장해주고 시집살이를 하지 않겠다’는 결혼 약속을 받아낸다. 그 후 그녀의 인생에서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결혼 생활을 보내며, 남편과 함께 과감하게 유럽 여행을 떠난 나혜석. 그녀는 유럽에서 새로운 예술 세계에 대한 눈을 뜨는데, 남편보다 더 예술을 잘 이야기할 수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진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국에 돌아온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게’ 된다.


나혜석은 해외여행과 이혼 경험으로부터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획기적인 글을 쓰는데 이는 1930년대에는 너무나 시대초월적인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현모양처상’도 진보적인 상이었는데, 그녀는 근대적 여성상조차 뛰어넘은 주장을 한 것이다. 집에서 가사 일에 충실하고 자식 양육이라는 의무를 지닌 여성상을 과감하게 따르지 않으며,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다 빈 몸으로 쫓겨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녀를 파멸로 몰아 놓은 남성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식도 만나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살아간다.


이혼 후에도 계속된 나혜석의 미술 작업에 조선 사회는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그녀의 생활은 점점 병들어 간다. 절집을 떠돌아다니고 양로원 생활을 하지만 걸핏하면 몰래 빠져나갔던 나혜석은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길에서 홀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도 죽은 상태였다. 남성으로부터 버림받고 가부장적 질서를 따르지 않음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받은 것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 50여년동안 극과 극을 오가는 인생을 경험한 나혜석. 여성을 그림의 주제로 택하고 글의 소재로 삼으며 조선 여성의 인권 진보를 위해 자신이 먼저 앞서나갔다. ‘여성’의 이름으로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힌 그녀. 세월이 지난 지금은 나혜석을 당당한 선구자로 여기고 있다.

최은영 기자  transe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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