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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섹션] 근현대를 걸어온 여성-사의 찬미 윤심덕
  • 권형우 기자
  • 승인 2005.11.06 00:00
  • 호수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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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세간의 화제가 된 현해탄에 몸을 던진 두 남녀. 남자는 거부의 아들이자 극작가였던 김우진, 여자는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윤심덕(1897~1926)이었다. 둘의 죽음은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이 둘을 좇은 젊은이들의 자살이 속출했다. 시대가 흘러도 이 둘의 이야기는 세상의 이목을 끌고 있고, 윤심덕의 노래 이름을 딴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윤심덕을 단순히 사랑에 몸을 바친 비련의 여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윤심덕은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조선 총독부 후원 아래 유학의 기회를 얻는다.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녀는 이후 귀국하여 독창회를 가지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화첩기행』에서 윤심덕을 다뤘던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김병종 교수는 “제국 극장의 전속 단원 제의도 받았던 그녀가 평생 꿈꿨던 이탈리아행이 실현됐다면 마리아 칼라스와 같은 성악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그녀가 가졌던 뛰어난 재능을 전했다.

누구보다도 당당했던 그녀는 ‘진정한 신여성’이라는 찬사와 ‘왈패’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당당한 성격은 그녀가 극회 토월회에 가입하게 된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토월회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윤심덕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에 맞춰줄 것을 가입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자신감에 찬 그녀의 성정을 잘 드러내는 것이었다.

토월회 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극작가 김우진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유부남이었던 김우진과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국내 최초의 음반인 『사의 찬미』를 제작한 뒤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연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다.

윤심덕은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이었지만, 그녀의 빛이 화려한 만큼 그림자 역시 어두웠다. 김 교수는 “당시 한국에는 성악가인 그녀에게 어울리는 변변한 무대 조차 없었고, 혼기가 찬 그녀에 대한 염문이 꼬리를 물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며 “이런 절망적인 나날 속에 그녀는 김우진과의 사랑에 생의 마지막을 걸었던 것 같다”며 자살의 원인을 설명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그녀의 노래처럼 그녀의 일생은 시대와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녀의 삶은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노래는 대중음악의 시초를 알렸고, 당당하고 활기찬 삶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유유히 굽이치는 현해탄 물결처럼 그녀의 숨결은 아직까지 숨 쉬고 있다.

권형우 기자  spinoz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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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의 찬미』 속에서의 김우진과 윤심덕 /네이버 자료사진

영화 『사의 찬미』 속에서의 김우진과 윤심덕 /네이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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