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인이 말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은 정직하고 진실한 눈물이라고. 그리고 또 한 소설가는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연세춘추」 기자인 내가 가장 나중에 지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학술면이 발행되지 않았던 방학호. 그래서 학술부 기자인 나는 학술 기사가 아닌 방학특집면을 맡아 ‘배움’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쓰게 됐다. 지금까지 내가 써 왔던 종류의 글도 아니고, 진부한 소재의 기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과연 방학 때 그 기사를 누가 보기나 할까’라는 생각에 조금의 긴장감 조차도 갖지 않았다.

학업과 신문사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발로 뛰어야 하는 학보사 기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아마도 ‘성실함’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매너리즘과 괜한 반항심을 갖고 작성한 기사는 아무런 핵심 없는 그저 그런 전단지 광고만도 못했다. 나 역시 기사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린 댓가로 부끄러움까지 느끼게 됐다.

방학호가 발행되고 얼마 후 같은 학과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고학번 선배가 내 옆자리로 다가와 앉더니 “너, 이번 기사 보고 정말 실망했다”며 아무런 핵심없는 기사에 대해 따끔한 말 한마디를 던졌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겉으로는 구태의연한 변명을 대며 멋쩍게 웃으며 넘어갔지만 옹졸한 자존심에 ‘선배가 뭘 안다고…’ 생각하며 솔직한 충고를 해준 선배를 원망하고 말았다.

내 관심 분야가 아니라고, 어느 독자의 눈길도 닿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지어 버린 나의 이기심이 나를, 그리고 「연세춘추」를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내 이름 석자를 걸고 지면에 나가는 기사는 비록 그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모든 게 나의 몫으로 돌아오게 돼있다. 아이템 선정에서부터 취재, 작성, 그리고 지면화 된 뒤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기자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성실함을 스스로 포기한 나는 최후의 방편인 책임감 버리고 말았다. 방학호 신문에 묻어난 나의 부끄러움은 앞으로 나를 더욱 더 채찍질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은 바로 ‘책임감’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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