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대 생물학과 유민 교수(지난 1983년 생물학과 마침)

올해로 결혼 22주년이니까 참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이정도 세월이면 대부분의 옛 일을 잊게 마련이지만 신기하게도 처음 아내를 만나던 그 순간만큼은 점점 더 또렷한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그만큼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이리라.

내가 2학년으로 복학한 것은 1980년 가을이었다. 친구들보다 앞서 군에 다녀왔기 때문에 복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더구나 생물학과 특성상 많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복학 초에는 늘 쭈뼛쭈뼛하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과에서 야외실습을 가게 됐고 채집에 열중하고 있는 나에게 먼저 인사말을 건넨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가지런한 치아와 가늘고 긴 손가락이 무척 예쁜 여학생이었다. 야외실습을 계기로 후배들과 대화의 문이 트였고 당시 나는 유머가 뛰어나 여학생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다. 내 이야기가 재미있을 때 고개를 젖히며 웃는 아내의 모습은 더욱 생기발랄해 보였고 그 모습을 보려고 나는 또 다른 유머를 개발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모임이 있어 이전에 살던 금호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우연히 아내와 마주치게 됐다. 둘만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반가왔다.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공통점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아내의 집이 응봉동이라 금호동 바로 옆 동네라는 점, 내 여동생과 아내가 모두 금호여중 출신이라는 점 등의 예사롭지 않은 공통점들 말이다. 그리고 이날 이후 나는 마력에 끌린 듯 아내에게 점점 몰두해갔다. 특별한 모임이 없어도 일부러 교회에 가는 척 아내가 타는 버스에 함께 올라타곤 했다. 그리고 3학년이 채 끝나기 전 어느 가을날 나는 아주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너에게 한 좋은 남자가 나타날 거라고 말이다 (아내는 이때 속으로 참 우스웠다고 한다. 넌지시 암시를 던지며 유혹하는 이 남학생. 그 속이 어찌 뻔하지 않았겠는가).

어쨌든 우리가 만나는 횟수는 점점 잦아만 갔다. 신촌시장에서 술도 마셨고, 이화여대 앞 튀김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아내는 처음엔 경미라는 친구와 늘 붙어 다녔는데 이 때문에 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항상 3인분의 용돈을 준비해야만 했다. 연고전 때는 어깨동무하고 목이 터져라 아카라카를 외쳤고, 한겨울 포장마차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따끈한 우동 국물을 나눠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엔 여학생과 남학생이 함께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고 또 금방 소문이 나는 터라 우리는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만나는 공공장소로 결정하였다. 스터디그룹이 유행이었기에 도서관에서 남녀 선후배가 같이 공부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이 덜 깬 채 새벽 첫 차를 타고 도서관을 향하면서도 아내의 자리까지 잡아 놓는 즐거움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물론 강의실에서는 철저하게 앞뒤로 떨어져 앉았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늦은 밤 도서관 계단에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살짝 나누던 키스의 맛은 지금도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서투른 실력으로 아내를 호기있게 오토바이에 태우고 신촌시장에 외상값 갚으러 가다가 사고를 당한 적도 있다. 그 때문에 나는 한 달 동안 목발을 짚어야만 했고 덤벙대는 내 성격에 아내가 엄청 화를 냈다. 수박을 사들고 집을 찾아갔건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때 수박만은 챙겨 들어가던 아내의 뒷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또 한번은 한국사 시험을 보면서 내가 아내의 답안을 참고(컨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A가, 아내는 C가 나오는 바람에 아내가 토라진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매사에 고집센 내 성격 때문에 아내가 토라질 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였다.

우리가 드디어 결혼을 발표한 것은 바로 사은회 날. 은사님들과 친구들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원망과 함께 엄청난 축하를 같이 받았고, 이듬해 봄날 졸업과 함께 우리는 결혼에 골인하였다.

76학번의 졸업 25주년 재상봉이 있어 바로 지난 주에 모교를 방문했다. 우리의 흔적과 추억이 그대로 살아있는 연세 교정이지만 모교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청송대도 작아졌고 꽃다방과 독수리다방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와 냉면을 나누어 먹던 학생식당과 함께 거닐던 신촌의 밤거리 등 모든 것들은 지금도 그대로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 하얀 치아가 유난히 돋보이던 그 여대생은 이제 중년의 여인이 되어 내 옆을 지키고 있다. 연세인이기 때문에 더욱 자랑스런, 그리고 더욱 사랑스런 우리 집사람이다.

계명대 생물학과 유민 교수 (지난 1983년 생물학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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