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을 만나다

지난 3월 2일,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를 이뤄내기까지의 과정에는 지난 30여년 간 호주제 폐지를 위해 노력해 온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이 중심에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곽소장은 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주요업무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가족법을 바탕으로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법률적으로 상담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는 일을 해왔다는 곽소장.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이 분야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곽소장은 이화여대 법학과 재학시절 학번대표 및 법대 회장을 맡아오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동시에 항상 A학점을 받을 정도로 자기 일에 철저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나선 친구들을 보며 대학생이 자기 능력 신장에만 신경쓰면 되지 뭐하러 나설까 의아해했었다”는 곽소장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개인주의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상담소의 어머니 이태영 박사와의 인연

곽소장의 진로결정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평생을 여성에 대한 사회의 불평등에 맞서 싸워온 이태영 박사였다.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곽소장은 졸업 직후 방송국 PD 일을 시작했지만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언론인보다는 직접 해결에 나서는 일에 더 매력을 느꼈고, “좀 더 발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론인보다 상담소 일을 맡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이박사의 권유로 상담일을 시작하게 됐다. 곽소장은 이박사를 “대학 시절 법대 학과장이셨던 ‘스승’이자 ‘선배’이지만 나에게는 그러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분”이라고 회고했다.

가족법과 함께 해 온 30년 역사

1972년 상담일을 시작한 이래 약 30년 동안 곽소장이 해 온 상담은 무려 15만여 건이나 된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가족사회학으로 석·박사 연구를 해 많은 가족법 관련 사례들을 공부했던 그이지만, 상담을 통해 실제로 접하는 얘기들은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다.

곽소장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참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한 여성의 얘기들을 들으며 같이 눈물을 흘린 경우도 많다”며 “당사자들을 모두 불러 상담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낼 때 가장 감동스럽다”며 상담 내용들을 들려줬다.

곽소장이 호주제 폐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 역시 상담으로 인해서다. 곽소장은 “부모가 이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전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 재혼 후 아이들이 받는 고통은 호주제가 만들어낸 비극 중의 하나”라며 “상담을 통해 법으로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접하면서 부당한 가족법 개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며 참여 동기를 설명했다.

하지만 호주제를 폐지할 때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곽소장이 TV토론이나 강연을 한 다음에는 종종 상담소로 수십 통의 욕설이 담긴 편지와 전화가 쇄도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곽소장은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욕설이나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하는 행동이 정당한 요구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며 당찬 모습을 보였다.

호주제가 폐지되던 날 기분이 어땠냐는 기자의 질문에 의외로 “생각보다 담담했다”고 말하는 곽소장. 그는 “내가 원래 희노애락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구식 스타일’이라 그래요”라고 설명한다. 한편으로 곽소장은 “국회에서 간단히 동의만 하면 될 것을 50년 동안이나 끌어온 것이 허망하기도 하고, 폐지의 순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이박사 생각이 나서 안타까웠다”며 그날의 소감을 전했다.

호주제 폐지 이후 남겨진 과제

최근 4대 가정법률상담소장으로 재선출된 곽소장은 아직도 해야할 일들이 많다. 그는 “호주제 폐지는 양성평등사회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며 “호주제가 있었던 자리에 새로운 호적등록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곽소장은 무엇보다도 “호주제 폐지에 반대했던 세력들, 특히 호주제 폐지로 인해 상처받고 힘이 빠져있을 남성들에게 가족의 존폐 여부와 호주제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호주제 폐지가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덧붙여 그는 학생들에게 “젊은 세대들이 사회의 주역이 될 때까지 시야를 넓게 가질 것”을 당부했다. 그는 “점차 사람들이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 같아 걱정”이라며 “어려운 처지의 여성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의 성차별적인 관습이나 정서에 안주하지 않고 바꿔나가는 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을 불문하고 대한민국의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적어도 ‘가정’ 사건에 관련해서만큼은 신뢰하고 도움받을 수 있는 상담소를 운영할 것”이라는 곽소장. 그는 비록 상담소가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생겨났지만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사회기관으로 정착시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로 거듭날 때까지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모두가 평등할 수 있는 사회의 희망을 보았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