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잇따라 서울대, 우리대학교, 고려대가 이구동성으로 학생선발을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취지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서울대의 수능반영최소한에 대한 입장표명, 3대학의 총장회동 등이 그러한 맥락으로, 우선 학생선발의 자율권이라는 물꼬를 트면 무엇인가 상황이 좀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에서이다. 이에 대해서 교육부와 소위 교육의 3불(不)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아니 긴장하는 눈초리다.

역사적으로 대학은 자율적 기구로서 그 전통과 본질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영어로 자율(autonomy)은 그리스어 autonomia 에서 온 말인데, ‘자기 입법’을 뜻한다. 스스로 법을 정해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자율이다. 15세기 중세대학으로 시작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가면 당시의 ‘학생감옥’이 전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 법과 규정을 정하고 이를 어긴 학생에게─비록 친구일지라도─ 엄한 벌을 내렸다. 물론 이는 당시 대학의 자율과 자치(自治)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대학자율권이 국가수중으로 넘어간 계기는 18세기 계몽주의였다. 절대권력의 국가형성과 함께 교회도 대학도 국가의 관리 하에서만 자율이 허용됐다. 지금 우리가 바로 이러한 역사적 흔적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교육부나 자율화 반대 측은 대학에 자율권을 확대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며, 특히 공교육 살리기의 차원에서 보면 부적당하다는 판단이다. 반대로 대학에서는 자율성의 확보가 대학이 세계적 수준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물론 양쪽 모두 명확한 근거 제시나 논리입증은 없다. 일단 무엇이라도 서로 바꿔서 시도해 보는 기회도 있어야 할 일이고 또한 교육의 성과란 당장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쪽의 입장을 명확한 잣대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쌍방의 입장차이가 인식될 뿐이다. 그래서 서로 실질적으로 대화하기도 어렵고, 한가지의 묘방(妙方)으로 풀어내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오늘날 교육개혁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살아나오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빠져 나오지 못하면 익사체로 발견되고 말 것이다. 대학의 자율성 문제를 소위 ‘(중고등)공교육 살리기의 차원’에서만 다루지 말고─물론 교육부의 긴급한 현안이고 중요한 사안임은 틀림이 없지만─ ‘교육개혁이라는 보다 커다란 차원’에서 본다면 상황은 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실직고하자면 지금 우리의 중등교육은 거의 대학진학으로 편향(偏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육개혁은 ‘대학개혁’ 내지 ‘대학의 정상화’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만약 대학이 바로 선다면, 이에 지향되어 있는 중고등학교도 자연적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것 아닌가? 굳이 공교육 정상화를 외치지 않아도 바른 길을 가는 대학을 보고서도 과연 다른 길로 가는 중고등학교가 있을까?

이런 연유에서 교육개혁은 대학개혁이나 대학의 정상화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본다면 대학의 본질과 사명으로 대변되는 ‘대학자율성’의 문제가 정책당국자와 대학간에 보다 심도 있고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로부터 교육개혁의 움직임이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감 있게 전개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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