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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나의 힘] 아리스토 파네스의 <새>인간의 유쾌한 희망에 '날개달기'
  • 최은영 기자
  • 승인 2005.05.23 00:00
  • 호수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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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라는 낱말을 들었을 때,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희망이라는 생각보다 길거리의 살찐 비둘기들이 생각나는 요즘. 겁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뒤뚱뒤뚱 걸어 들어오는 비둘기들을 보면서 저들이 인간살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겁이 없는 것인지, 다 알기 때문에 겁이 없는 것인지 새삼 궁금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 『새』는 ‘새’에 대한 현대인들의 단상을 더욱 깊게, 그러면서도 꽤나 유쾌하게 만들어준다. 고대 그리스 희극작가 중 최고로 손꼽히는 아리스토파네스. 그의 작품은 아테네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당시의 정치 상황과 정치가들의 모습에서부터 보통 시민들의 모습까지 담아내는 생생한 그림이 되기도 한다.

정치적 풍자를 많이 그린 다른 작품과는 달리 『새』에서 그는 가벼운 풍자와 익살을 보여줄 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우엘피데스(낙천가라는 뜻)와 피테타이루스(믿을 만한 친구라는 뜻)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 아테네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아테네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아테네의 시민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관습과 법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관습에서 벗어난 자연 그 상태인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그 곳으로 자신들을 인도해 줄 안내자로 ‘새’를 선택한다.

예전에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새들의 왕이 된 에폽스는 에우엘피데스와 피테타이루스로부터 새들이 주인이 되는 이상적인 왕국을 설립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에폽스는 이 희극에서 새와 인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등장한다. 원래부터 인간을 적대적으로 생각했던 새들은 에우엘피데스와 피테타이루스의 제의를 듣고 격분하며 인간들과 싸움을 일으킨다. 그러나 에폽스의 중재 덕분에 인간과 인간을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새들의 싸움은 진정이 된다. 평화가 찾아오자 예전의 절대 권력자였던 새들이 새로운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피테타이루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들만의 새로운 도시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가 만들어진다. 그 후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는 날이 갈수록 번창하고 신들을 눌러 우주를 제패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클레스와 같은 우리의 눈에 익숙한 신화 속의 주인공들도 등장한다. 신화 속의 신들과 인간은 위대한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 앞에서는 미약한 존재가 돼 버리며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는 신들을 모두 제압하며 평화의 나날을 꿈꾸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작품 속에는 언어의 상징성 문제, 섹슈얼리티, 금전주의, 당시 아테네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 등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새』가 현대인의 시선을 끄는 가장 큰 매력은 사회를 옭아매는 수많은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의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보여준 것에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새’가 인간보다 위대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전제 아래 새들의 왕국을 이상향으로 바라봤던 것일까. 경쾌한 코러스와 밝고 명랑한 주인공들의 대사, 변덕스럽고 마냥 싸우면서도 즐겁기만 한 상황들은 현대인들이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를 마냥 부러워하게 만든다.

“진정한 희극은 비극이 뒤에 숨어 있다”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히지만 이상향을 상상하는 순간 유쾌해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 인간들의 발 틈으로 뒤뚱뒤뚱 다니는 새들, 그들이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보다 아름다운 새들의 나라를 가지고 인간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최은영 기자  transe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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