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인을 비롯한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남녀간의 만남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됐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연세인에게 남녀간의 만남은 보기 드문 일로 만남의 기회 또한 적었다. 한 남학생은 지난 1961년 2월 27일자 「연세춘추」를 통해 “우리대학교가 남녀공학은 하고 있지만 거친 느낌이 든다” 며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남·녀 칠세부동석’이 아직도 유효하던 이 시절, 포크댄스는 건전한 남녀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기회로 혜성같이 등장했다.

지난 1961년 “남녀공학의 의의를 살리고 남녀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녹양회는 포크댄스 강습회를 실시했다. 포크댄스는 학생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지난 1963년 무악축전에 이르러서는 ‘무악의 밤’ 행사의 일환으로 야구장에서 진행됐다. 여학생들은 세계 각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남학생들에게 춤을 인도했다. 이후 포크댄스는 무악축전에서 1천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주요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무악축전의 포크댄스는 다른 대학에는 없는 행사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연세인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 학생들도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 1967년 5월 15일자 「연세춘추」는 “동문, 교직원, 외국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E대생까지 참가하고 있다”며 포크댄스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도했다.

무악축전에서 보여준 호응에 힘입어 “연세인의 건전한 교양과 포크댄스 보급을 위해” 레크레이션 연구회와 우리신문사는 ‘폭댄스’ 강습회를 신설해 매주 수요일 진행했다. 당시 시작 20분 전부터 남녀 학생 1백여명이 참석하는 열의를 보이는 등 포크댄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20여년 동안 지속된 포크댄스는 “형식적으로 굳어간다”는 비판을 받으며 지난 1982년에는 “축제에 학술행사와 민속놀이의 비중을 두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서서히 종적을 감췄다.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적인 일이 돼버린 요즘의 남녀간 만남과 비교해 봤을 때 당시 학생들의 포크댄스를 통한 수줍은 만남이 보다 풋풋하고 아련하게 느껴진다. /김민지 기자 puremj@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