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돌아오는 5월, 스승의 날. 카네이션이 오가고 스승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덕담을 주고 받으며 뜻깊은 날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 정년퇴직을 앞두신 연세의 오랜 스승님 한 분이 계시다. 바로 윤동주를 기리는 일에 열중하고 계신 정현기(문리대·현대문학)교수님이 그 주인공이시다. 교직에 계시며 수십 번은 맞이하셨을 스승의 날이지만 정년퇴직을 앞둔 올해엔 감회가 남다르진 않으셨는지 뒷산으로 난 반달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길 가에 난 풀꽃에 얽힌 교수님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교수님께서 읊어주시는 시도 감상하면서 자연과 함께한 즐거운 초여름의 한 자락이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우선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간 우리는 꽃바구니와 그 꽃처럼 해맑은 얼굴을 한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스승의 날이라고 찾아온 제자들이 술 한 잔 하자고 자꾸 조른다며 싫지 않은 볼멘소리를 내신다.

“마음을 열고 강의하니까 애들이 편하게 대해. 나한테 배우는게 많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중요한건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거든. 이게 없이 강단에 서면 안되지. 요즘도 연락이 자주 와. 결혼하고 애 낳고도 연락오고, 내가 주례를 봐준 애도 있고, 내가 가르친 학생 들 중에 시인으로 등단한 친구도 있고 교수가 된 제자도 있지만 그것만이 가르치는 이의 보람은 아니야. 평범하게 자기 삶을 잘 살아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그 자체가 보람이지. 제 길에서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나가는 제자를 보는게 내 보람이야.”

가장 보람을 느끼셨을 때가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대답하시는 교수님의 깊은 눈빛에서 제자들을 생각하시는 애정을 어렴풋 느낄 수 있었다. 올해 스승의 날에도 어김없이 동료 교수분들과 만나 약주를 하셨다는데, 이제는 그 중에 교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제자가 함께 하시도 한다며 너털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정현기 교수님은 연세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1965년도에 우리 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신 동문이시기도 하다. 학생으로서 캠퍼스를 누비시던 그 때 교수님은 어떤 학생이셨는지 묻자 유일한 낭만은 강의가 끝나면 친구와 읽은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였다고 말씀하셨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들 가난했고 어려웠던 시절에 교수님 또한 예외가 아니셨고 때문에 지금의 학생들이 누리는 낭만보다는 현실적인 허기증과 지식의 허기증을 채우기에 급급했다고 회상하셨다.

반달길 가에 난 풀꽃을 뜯어주시며 씹어보라 권하신다. 교수님께서 주신 시엉이란 풀은 씹으니 신맛이 났다. 요즘 애들은 자연을 모르고 자란다며 안타까워 하시는 교수님. 지식의 반은 강의에서 얻되 나머지는 삶 그 자체를 텍스트로 삼아 자기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기 삶을 책임질 후반부 인생의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는 대학 시절에 많은 독서와 경험을 해야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우리는 평소에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의 모습만 보고 있지만 실제 교수님에겐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의 연구도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정현기 교수님은 평론분야 쪽으로 긴 여행을 해 오셨는데, 스승으로서의 삶과 학자로서의 삶 중 어떤 것에 더 만족하시는지 여쭈어 보았다.

“학문이 깊을수록 학생들에게 가는 울림이 크겠지. 학자로서 말하자면 한창 저서를 많이 남기고 해야 할 40대에 나는 실제 비평으로 돌았어. 80년도 정치적인 격동기에 해직되 어 7년 반을 강단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실제 비평에만 전념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지. 평론집도 몇 권 냈지만 지금은 현대한국소설사를 쓰고 있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혼신을 다해. 어떤 것이 더 좋은지는 말하기가 힘들어. 둘 다 잘하고 싶지만 못하지. 죽 은 뒷 날 누군가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퇴직하면 어떻게 지내실 예정이냐는 질문에 우선은 글을 더 쓰면서 서당 하나 지어 아이들이나 나이드신 분들을 가르치면서 보내고 싶다고 대답하시는 정현기 교수님. 요즘은 일지 형식으로 매일 시를 하나씩 쓰고 계시다며 지금까지 써오신 시를 우리에게 읽어주시기도 했다. 그 중에서 시 하나를 골라 실어본다. 교수님과 함께 걸었던 녹음 무성한 반달길을 회상하며.

바쁜 5월

드디어 꾀꼬리 울고

맹꽁이도 덩달아 뿌드득

젊은이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팔짱 낀 남녀 보기도 좋다.

꽃 한 송이

선물 꾸러미 얹어

수줍게도 내미는구나.

나이든 5월

마음도 숨차고

부끄러움 앞서

바쁜 5월은

눈총의 짐이로구나.

5월이 가면

보리 누름에

밤꽃 피어 천지를 채우겠구나.

2005년 5월 16일 어제가 스승의 날이라고 오늘 학생들 수줍게 꽃을 내미네.

 

 /정소진, 박슬기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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