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현 교수와 함께 교정을 거닐다

김태현 교수(경영대·생산관리)는 지난 1979년 우리대학교 경영학과를 마친 동문이다. 우리대학교 창립 120주년을 맞아 김교수와 함께 교정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4일 낮 1시 김교수를 청송대에서 만났다.

정진환(아래 정): 청송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김태현(아래 김): 다들 ‘청’자가 푸를 ‘청’자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들을 ‘청(聽)’에 소나무 ‘송(松)’,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야. 용재 백낙준 박사가 지으신 이름이지. 아, 저기 비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네. 참 멋진 이름 아닌가?

: 네. 정말 그렇네요. 교수님의 학창시절 청송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 지금은 공연도 많이 하고 단체 소풍도 많이 오는데 옛날에는 지금보다 숲도 더 울창하고 한적했던 곳이었어. 수업하기 싫은 날에는 교수님을 졸라서 여기서 야외수업을 한 적도 많았지.(웃음) 청송대는 가히 낭만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어.

: 청송대에 애정이 많으신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김: 사실 우리 집사람이 이 근처에서 태어났어. 장인어른이 당시 우리대학교 교수셨는데 교수사저가 청송대 부근이었거든. 그래서 집사람이나 나나 청송대에 오면 항상 집에 온 것 같은 푸근한 기분이 들어.

청송대는 성암관 뒤쪽에서 동문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는 자연 녹지로서 연세인의 쉼터이자 데이트 코스, 또는 토론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축제기간에는 시가 자리하는 문학관으로, 방송제의 노천 방송국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일행은 이어 노천극장으로 이동했다. 마침 노천극장에는 2~3명의 학생들만 망중한을 즐기고 있어 모처럼의 고요함과 한적함이 물씬 느껴졌다.

: 낭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천극장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마침 다음주 아카라카 응원전도 이곳에서 있네요.

김: 노천극장은 원래 공연하던 곳은 아니었어. 주로 입학식이나 졸업식을 거행하던 장소였지. 좌석도 지금은 보다시피 대리석이지만 옛날에는 잔디였어. 덕분에 관리가 힘들기는 했지만 운치가 있었지.

: 여기 좌석에 새겨진 이름들은 무엇인가요?

: 노천극장 보수공사때 성금을 낸 동문들의 이름이야. 사실 내 이름도 있어. 그런데 어디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네.(웃음) 정: 노천극장에서 바라보는 우리학교의 전경이 장관인데요.

: 그렇지. 저기 신촌로터리도 보이네. 옛날에는 서문이 아니라 신촌로터리 뒤편 창천동에 하숙집이 밀집해 있었어. 그때는 무악학사가 없어서 지방학생들은 거의 다 그쪽에서 살았지.

: 옛날 자료사진을 보면 저기 백양로를 학생들이 가득 메우고 시위하는 모습도 보이던데요.

: 그때는 차가 별로 없어서 백양로가 보행자 도로나 다름없었어. 그래서 독재정권 시절 각종 시위가 이곳에서 이뤄졌단다.

노천극장은 1933년 5월 준공된 연세인의 단합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당시 교직원과 학생 전원이 각각 하루씩 참여하여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동양 최초의 반원형 계단식 노천극장은 이후 여러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와 같은 현대식 설비를 갖추게 됐다. 한편 백양로는 1920년대에 조성된 연희의 관문으로 농과대 학생들의 실습용으로 도로 좌우에 은백양나무를 심은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그러나 은백양나무는 지난 1968년 은행나무로 교체됐다. 백양로도 노천극장과 같이 이후 여러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과 같이 곧게 뻗은 길을 가지게 됐다.

: 노천극장하고 청송대를 둘러보았는데요, 그럼 교수님께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건물을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 단연 백양관이지! 지금은 학부대학 건물이지만 그때는 상대건물이었거든. 학창생활과 교직생활 초기를 여기서 보냈어. 저기 5층 왼쪽 방이 바로 내 연구실이었어. 건물이 지금은 낡기는 했지만 봄만 되면 주변에 벚꽃이 만발하는데, 그 광경이 정말 압권이지.

: 그런데 백양관은 두개의 건물이 분리돼있는 특이한 건축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잘못 올라갔다가 낭패를 봤다는 학생들도 적지 않더군요.

: 백양관의 구조는 ㄷ자 형이라서 미학상으로는 아름다운데 건물 수용량은 적게 된다는 단점이 있어. 다소 비효율적이지.

: 반면 지금의 상대건물은 정문에서 너무 멀어 통학에 애로사항이 많다고들 합니다. 김: 나도 동의해. 내가 다닐 때는 이 백양관도 멀다고 투덜댔거든.(웃음) 그래서 한때 상대에서 신촌역까지 셔틀버스 운행도 계획했었는데 무산되고 말았지.

김교수는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며 “우리 학생들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되면 학교에 어떤 식으로든 그 은혜를 환원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교수의 애교심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용재관이 옛날에는 중앙도서관(아래 중도)이었다는 이야기, 지금의 중도부지는 야구장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축제 때 이화여대 학생들과 포크댄스를 즐기곤했다는 이야기 등 김교수의 추억담은 끊이질 않고 계속됐다. 덕분에 일행은 김교수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연세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봄교정의 아름다움을 실컷 만끽했을 무렵에서야 일행의 즐거운 수다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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