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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은 채 퍼뜨린 아름다운 혁명사회복지대학원장 이익섭 교수
  • 나은정 기자
  • 승인 2005.05.09 00:00
  • 호수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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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이지 않음’은 나에게 축복입니다”. 지난 1월 26일 우리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장에 임명된 이익섭 교수(사회대·사회복지정책),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맹인 교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장애인을 걸인 취급했던 사회의 편견과 냉대 속에서 이교수는 당당히 장애를 딛고 일어나 장애인 복지 문제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다.

이교수는 12세의 나이에 망막염을 앓다가 시력을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왔다는 ‘장애’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눈에는 자꾸만 구름이 끼었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세상은 어린 그에게 좌절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어머니였다. 만 35세의 나이로 남편을 잃고 홀로 5남매를 기른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 후 설상가상으로 찾아온 아들의 실명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보다 먼저 점자를 배우고 그에게 미국, 일본 장애인의 성공사례집을 읽어 주며 “너도 할 수 있다”고 수시로 격려했다. 이교수는 “우리 가족은 빈곤계층으로 가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노력으로 힘겨웠던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 나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어머니로부터 힘을 얻었다는 그는 ‘무엇이든 한번 해보자’며 꿈을 키웠고 그때부터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이교수는 다른 감각을 통해 이해하고 소통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배우며 14세 때 시각장애인 교육기관인 ‘국립서울맹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변호사가 돼 사회의 약자들을 돕고 싶었다”는 그의 어린 포부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대학진학이나 사회진출을 꿈꾸기엔 학교의 여건이 너무나 열악했던 것이다. 당시 학교에는 점자로 된 책이나 참고서가 부족했고, 단지 전문교과로 안마·해부·침술 등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가 일반 고등학생들처럼 공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교수는 ‘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길은 대학에 가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며 학문에의 뜨거운 열망을 품고 연세대학교를 선택한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비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었지만 당시 우리대학교의 응시자격이 교정시력 0.3 이상으로 제한돼 있어 서류를 접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에게 길이 열렸다. 유일하게 시력 제한이 없던 신학과로의 진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한 후 즐거움도 잠시, 그의 머릿속에는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갗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학’이라는 학문을 어렵게 느꼈고, 신앙심도 부족했다고 고백한다. 머릿속의 물음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 채 대학 후반기에는 ‘안양 음성 나환자촌’에서 나병 말기의 실명된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로 사회의 소식을 테이프에 녹음하는 등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또한번 허탈한 경험을 한다.

그곳의 환자들은 나병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서서히 삶의 희망을 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느낀 어려움들에 대해 교수들과 끊임없이 상담했고 그 과정에서 한 교수로부터 ‘사회사업학을 공부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하지만 청년 이익섭은 “불투명한 미래, 무책임한 사회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며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그가 느꼈던 한국사회는 장애인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장애는 ‘재수없어서’ 얻는 것이고 한국은 ‘재수없이’ 장애인이 되면 그것으로 끝인 곳이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그에게 장애인도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의 미국 유학생활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론 그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빠르게 읽기’가 되지 않아 많은 책을 읽고 시험을 준비하는 데 고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2천여명의 자원봉사 인력이 이교수가 책을 찾아 읽고 논문을 편집하는 것을 도왔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효율성’과의 싸움을 이겨내 피츠버그대에서 석사학위를,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말대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없이 자신을 온전히 ‘이익섭’ 자체로 대해준 미국 생활에서 그는 장애인 복지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학과 재학 당시 교수와의 상담을 통해 사회사업학에 눈을 떴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장애인 복지대책을 세우는 대통령 자문기구에 들어갔다. 이후 이교수는 장애인 관련 단체장을 두루 거치며 장애인 인권·복지향상 등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내가 장애인 복지에 이렇게 힘을 쓰게 된 것은 준비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보이지 않음은 오히려 감사해야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교수의 겸손하지만 고집스런 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04년 1월 유엔 실무위원회에서 각 국에서 선출된 40여명의 임원과 함께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의 입안을 위해 준비한 것을 살면서 가장 보람있던 일로 기억하는 그는 지난 1월 24일부터 권리조약 제정을 위한 제5차 유엔 특별위원회에 한국대표로 다녀왔다.

또한 그는 오는 8월 1일 열릴 제6차 특별위원회를 준비하고 있다.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깨닫고 일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그가 강조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 존중’과 ‘복지를 통한 삶의 완성’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대학교의 이념인 ‘진리와 자유’는 내 몫이 아니라 진리를 갈구하고 자유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꿈과 도전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교수. “앞으로도 주어진 일을 끊임없이 신명나게 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그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나은정 기자  nej1210@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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