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의 역사와 함께 한 연세극예술연구회

화려한 조명과 함께 땀 흘리며 준비한 공연에 열렬한 박수와 갈채를 보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연세인들의 관심 속에서 성장해 온 극회가 있다. 우리대학교의 연극의 역사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연세의 자랑 연세극예술연구회가 바로 그것이다.

연세극예술연구회의 첫 시작은 1920년 연희전문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반일회(class day)라는 모임이 생겼는데 이 모임이 연극을 하기 위해 최초로 결성된 단체다. 당시 진행된 연극은 의상이나 무대장치가 전혀 없는 일종의 간이극 형태로 졸업생들이 자신의 장래를 상상하면서 각자 직접 쓴 각본을 익살스럽게 발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졸업행사 중 하나로 시작된 연희의 연극은 1930년대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32년 11월 『장발장』, 『로미오와 줄리엣』 등 여러 작품들을 학생들이 직접 무대에 올렸다. 순수하게 학생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런 연극들은 당시 아무런 창의성이 없던 연극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활발했던 연희의 극예술활동은 1940년대에 들어와 첫 위기를 맞게 된다. 일제의 학교 강점으로 학생활동이 침체상태에 놓여 연극 공연이 불가능하게 됐고, 따라서 모든 연극활동이 중단됐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다시 학생 연극 활동의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영화보다 연극에 동원되는 관객의 수가 더 많았던 이 당시에는 대학생이 참여해야만 새로운 기풍과 참신한 맛을 지닐 수 있다고 믿었던 연극계의 풍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 우리대학교는 꾸준히 공연을 올리며 한국 연극계의 자극제가 되어 여러 면에서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연희의 연극활동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또 한번 위기를 맞게된다.

위기 속에서 피어난 연극에 대한 열정

전란의 폐허 속에서도 극예술연구회의 정신적 지주라고 평가되는 오화섭 교수(퇴임·영문학)를 비롯, 연극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던 몇몇 학생들이 모이게 된다. 이것이 연희극예술연구회가 발족하게 된 배경이다. “예전에는 노천극장이 온통 흙밭이었다”며 “조명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것도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연극에 대한 정열 하나로 뭉쳤다”고 어려웠던 상황을 회상하는 연희극예술연구회 초대회장 임택근 동문(지난 1951년 정치외교학과 입학). 그는 1학년 때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연극에 대한 애착 때문에 초대회장을 맡게 된다. 오현경 동문(지난 1962년 국어국문학과 마침)은 연극 준비를 위해 합숙훈련을 할때가 잦았지만 예산이 없었던 당시 “먹을 밥이 없어서 쌀을 직접 가져와서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또한 소품이 없어서 소파나 침대 같은 현대식 물건들은 언더우드 생가에서 가져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재정적인 면에서 끝나지 않았다. 남녀가 연애를 하다 들키면 정학 처분까지 받을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자배우들의 수급이 원활지 않았던 것이다. 서승현 동문(지난 1965년 기악과 마침)은 “대부분 여학생들이 남학생들과 연극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며 “여자배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해준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연희극예술연구회 구성원들의 연극에 대한 애정은 끊이지 않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발전과 더불어 연극은 학교행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데 심지어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연극부원들의 지지가 당락을 좌우할 만큼의 영향력이 있기도 했다. 따라서 연희극예술연구회원이면 학교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고 그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발전을 거듭하는 연세극예술연구회

연희극예술연구회는 학생들의 순수 창작으로 인형극을 기획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며 1970년대를 맞이한다. 1970년대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스탭 위주의 연극 작업이 자체적으로 행해지면서 스탭의 보강이 이뤄질 수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재학생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한편, 그동안 ‘연희극예술연구회’로 통용돼왔던 극회 명칭이 ‘연세극예술연구회’로 바뀌게 된다. 그 후 연세극예술동문회가 발족돼서 이후 동문들은 연세극예술연구회 발전에 재정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큰 도움을 주게 된다. 1980년대는 시대적으로 활발한 연극활동이 불가능했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10명 이상이 모일 때는 경찰에게 꼭 신고를 해야했던 당시 『태풍』이라는 작품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결국은 검열에 걸려 공연하지 못했다”고 임형택 동문은 그 때를 회고한다. 또한 “1980년대는 우리에게 모색기였던 것 같다. 고대극회는 민중에게 다가서 마당극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영미희곡 중심에서 프랑스 구조주의 연극, 독일 연극 등을 주로 무대에 올렸다”는 이대연 동문의 말처럼 연세극예술연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당당히 연세 연극의 중심에 서서 1990년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연세극예술연구회의 역사는 계속된다

연세극예술연구회는 이렇게 연세의 역사와 함께 그들만의 전통을 만들며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됐다. 아나운서 임택근 동문(지난 1982년 경제학과 입학), 연출가 이기하, 표재순, 오태석, 김태수, 이영택 동문을 비롯해 무대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박동우 동문, 영화감독 배창호, 이장우 동문, 배우 오현경, 이대연, 서승현, 명계남 동문 등 이곳에서 배출한 수많은 동문들은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 90회가 넘는 정기공연과 더불어 지방공연, 소극장 운동, 거기에다 5년마다 한번씩 진행되는 동문합동공연까지 연세극예술연구회는 지금까지 수많은 동문들이 함께 한 공연들이 모여 극예술연구회의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연세극예술연구회의 또 한가지 자랑은 동문들과 후배들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선배들과 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말파티를 열고 있다. 서로 친목을 다지며 연세극예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연세극예술연구회는 우리대학교 창립 120주년을 기념해 연극 『한 여름밤의 꿈좭을 준비하고 있다. 연세 연극, 아니 대학 연극의 산 증인인 연세극예술연구회. 그들의 앞날에 더 밝은 빛이 발현되길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