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와 이현화의 <0.917>

“자, 「소나기」에서 ‘망그러진 꽃묶음’은 앞으로의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물로서..”

우리는 학창시절에 작품 속 각각의 소품들이 각기 상징하는 바가 있고, 그 줄거리 역시 큰 주제의 틀에 벗어나지 않는 문학 작품들만을 선생님들로부터 배워 왔다. 그런 방식의 문학 작품들에 젖어오면서 우리는 ‘상짱과 ‘의미’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고독과 불안을 표현하는 부조리극, 그 대표작 「대머리 여가수」

그런데 이 상징과 의미를 넘어서 연극 자체를 부정하는 희곡들이 있으니 우리가 흔히 부조리극이라 일컫는 그것이다. 현대 연극의 중요한 흐름이 된 부조리극은 특별한 줄거리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저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이나 모습을 제시할 뿐, 거기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다.

부조리극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는 그의 첫 번째 희곡 「대머리 여가수」에서 부조리극의 특성을 그대로 담아낸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영국식 살롱에서 평범한 시민인 스미스 부부의 대화로 시작된다. 둘은 저녁식사와 야쿠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구성원 모두가 바비 왓슨이라고 불리는 가족과 같은 아무 상관없는 주제들을 통일성 없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 부부가 자려고 하는 순간, 마틴 부부가 그들의 집에 도착하는데 마틴 부부는 서로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전에 어디서 뵌 거 같은데요”라는 대화를 나눈다. 그들 사이의 아무 의미 없는 대사들이 한창일 때, 소방대장이 갑자기 등장하고 그는 퇴장하면서 아래와 같은 대사를 남긴다.

소방대장 :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

스미스 부인 : 늘 같은 머리스타일이죠.

소방대장 : 아. 네. 그럼 안녕히들 계십시오.

마틴 : 행운을 빕니다. 불 많이 끄세요.

제목이 「대머리 여가수」인데 대머리 여가수는 극이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 극이 상영될 당시,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그래서 대머리 여가수는 어디 있다는 건데?”라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줄거리도 없고,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등장인물, 동문서답의 대사들은 부조리극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희곡에 대해 마광수 교수(문과대·국문학)는 “언어의 부조리, 스토리의 부조리, 사건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짹이라며 “의미를 찾거나 주제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해 부조리극으로서 「대머리 여가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밝힌다.

주인공들은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자신의 정체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을 통해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은 인간의 고독과 불안이다. 인물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언어는 스스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1950년에 발표된 이 희곡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함께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관계를,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자신의 존재를.

성(性)이 전도된 어른과 아이 「0.917」

이오네스코가 부조리극을 현대 연극의 한 흐름이 될 수 있게 했다면, 극작가 이현화는 한국 부조리극의 화려한 싹을 틔웠다. 그의 작품은 현대 산업사회의 현실을 잘 드러내는 현상들을 배경으로 삼아 미스터리적 플롯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현화의 「0.917」은 「대머리 여가수」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제목에서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대머리 여가수」와는 달리 동문서답이나 언어의 부조리를 통해 부조리극을 구현시키지 않는다. 그는 상황 상의 부조리를 통해서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나타낸다.

‘0.917’이라는 제목은 빙산의 수면 아래 잠긴 부분이 전체의 91.7%라는 것에서 착안한 것인데, 이는 우리에게 숨겨진 무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프로이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수면 아래 잠긴 많은 부분인 무의식을 통해 인간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이현화는 어른과 아이들의 숨겨진 91.7%의 성욕을 부조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91.7%의 욕망이 분출하면서 상황 속의 부조리가 구현되는 것이다.

「0.917」은 크게 세 장면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장면은 남자 혼자 있는 숙직실을 7살 소녀가 노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7살 소녀는 마치 매춘부처럼 요염하게 남자를 농락한다. 남자는 너무도 놀라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남자를 유혹하고 남자는 마치 구미호에 홀린 듯 당황하면서 소녀의 몸에 키스를 퍼붓는다. 두 번째 장면은 더욱 당혹스럽다. 부인은 자기 집에 있는 7살 소년의 모습에 처음에는 놀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측은함을 느끼면서 말을 걸며 잘해주기 시작한다. 부인은 소년의 몸을 어루만지며 행복감을 느끼는데 극중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던 소년은 갑자기 야수처럼 변해 자신의 몸에 술을 붓고 부인에게 마시라고 하고 부인은 그에 따른다. 이 두 장면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는 마치 어른 같다. 어른들이 행하고 있는 성적인 행위를 어린이의 모습으로 당연하게 흉내내고, 그것을 보는 어른들은 “너 사람이냐?”라고 물을 만큼 당황한다. 세 번째 장면에서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해 어리석은 어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녀 : 그 의심 많은 어른들이 우리가 외국 방송을 알아듣고 있다는 걸 눈치 채게 되면 얼마나 놀래겠니?

소년 : 허긴.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씩 산타클로스를 믿어주는 것만으로 안심하기를 바란다는 건 좀 무리겠지.

우리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부분이지만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빙산의 거대한 부분을 이현화는 아이와 어른의 전도된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음란한 행동을 흉내내고, 어른은 아이처럼 돌아가 구강기의 유아처럼 입으로 반응한다. 그런 어른의 모습에 아이들은 비웃으면서 세상에 대한 조소를 날린다.

「대머리 여가수」와 「0.917」이 위에서 밝힌 것과 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부조리극의 진정한 의미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부조리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아니다. 의미가 없는 부조리극에서도 기성 문학에 익숙해진 우리가 이렇게 하나하나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이다. 부조리극은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텍스트를 탐독하는 우리의 체제화된 사고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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