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1966 ~ 1987)

억압의 사슬은 두 손으로 뿌리치고 짐승의 철퇴는 두발로 차버리자 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 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 - 이한열 추모비에 새겨진 이한열 유고시 중에서

전두환 군부정권의 폭압적 통치가 최후의 몸부림을 칠 무렵, 그들이 뺏을 수 있는 마지막 생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시 21살의 청년 이한열(지난 1986년 경영학과 입학). 이한열 열사는 지난 1987년 6월 9일, 경찰의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씨의 사망 1백일을 추모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경을 저지하는 사수대의 역할을 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았다. 최루탄에 맞은 그는 한달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결국 숨을 거뒀다. 나흘 뒤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는 1백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평소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열(烈)자가 ‘매울 열’자라며 자신과 최루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하곤 했다는 이한열 열사는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거룩한 운명’으로 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돼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민주주의에 한걸음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한편 지난 2004년 9월에는 마포구 노고산동에 ‘이한열 기념관’이 건립돼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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