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병원, 그 역사의 발자취를 들여다보다

신촌역에서 우리대학교를 향해 걸어 올라오다 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세브란스 병원이다. 이러한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대학교의 상징, 떼놓을 수 없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저조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과거, 세브란스 병원은 어떠한 길을 걸어왔던 것일까?

광혜원, 세브란스 병원이 되기까지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보수 세력파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익이 급진 세력파의 칼에 부상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때, 조선에서 미국 공사관 공의를 맡고 있던 조선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근대식 의료기술을 통해 민영익의 목숨을 살림으로써 궁중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동안 바래왔던 병원 설립을 허가 받아 의료를 통한 복음 전파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병원이 바로 세브란스의 모태가 되는 광혜원이다. 이후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언더우드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제중원의 열악한 의료 시설로 인해 병원 운영은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당시 제중원의 책임자인 에비슨 박사는 병원을 신축하고자 했으나 자금난에 부딪히게 된다. 자금마련을 위해 캐나다에서 열린 선교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나온 그에게 한 젊은이가 병원 신축에 관심을 보여 왔고, 얼마 후 젊은이의 아버지가 찾아와 일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가 바로 미국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지배인인 세브란스였던 것이다.

이렇게 세브란스 병원은 한 의료선교사의 강한 의지와 헌신적인 기독인 사업가의 후원으로 1904년, 마침내 서울역 맞은편에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게 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병원의 80%이상이 파괴되고, 이를 계기로 세브란스 병원은 지난 1955년 현재의 위치로 확장 이전을 하게 됐다. 그 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은 연세대학교로 통합됐으며, 세브란스 병원이 지속적인 발전으로 점차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현재는 ‘연세대학교의료원’이라는 독립된 행정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의료선교활동의 선두에 서서

1895년 조선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자, 에비슨은 선교사들과 함께 전염병 퇴치에 전력을 다해 수천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등 전염병의 늪에서 조선을 구해냈다. 이에 대해 여인석 교수(의과대·의사학)는 “제사와 같은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전염병을 다스리려 했던 그 당시 조선의 보건 상황 개선에 혁신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그 밖에 세브란스 병원은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의사들을 러시아로 파견하는 등의 대외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으며, 또한 3·1운동과 같은 민족적인 위기에도 앞장서서 의료 활동을 함으로써 ‘국가 의료원’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 곳곳에 구호병원을 세웠으며, 전상자를 위해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현재 세브란스 병원은 호스피스와 자원봉사 교육을 실시하여 봉사 문화를 전파시키고 있다. 또한, 의과대학 학생들도 직접 의료팀을 구성하여 곳곳의 의료 낙후지역에서 진료활동을 펼치는 등 적극적인 의료구호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기독교정신으로 처음 알렌이 우리나라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펼친 것처럼 해외 15개국에서 적극적인 의료구호운동을 벌이고 있다. 의료원 홍보과 류성 직원은 “현재 세브란스는 몽골에 연세친선의료원을 세우는 등 활발한 의료선교활동을 하고 있다”며, “그 밖에도 세브란스 내 교수들이 자체적으로 주도하여 많은 의료선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서정민 교수(신과대·교회사)는 “과거부터 가장 많은 의료구호사업을 펼쳤고, 가장 많은 성과를 이뤘던 것이 바로 세브란스 병원이다”라며 자긍심을 내비쳤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 세브란스 병원

에비슨 박사는 “젊은 한국 청년들을 교육시켜 한국인 의사를 육성하지 않는 한, 외국인 의사만으로는 피상적인 일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 아래, 초보적인 수준의 의료·의학 서적만 있었던 조선의 상황 속에서 고등 대학 수준의 많은 의학 서적을 번역했다. 여교수는 “특히, 1902년과 1907년 사이에 진행된 에비슨 박사의 번역과 편찬이 있었기에 대부분의 의학과목의 한글 교과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며, 이것은 “당시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제 치하의 상황에서 한국인으로서 의학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에비슨 박사는 교과서 편찬과 동시에 유망한 한국 청년들을 병원 조수로 선발, 현대적 실무 의학 기술을 가르쳤으며 이에 따라 1930년대에 한국의 의학도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갔다. 세브란스 병원은 역량 있는 한국인을 교수로 채용함으로써 자생적인 의학 연구 기회의 통로를 제공했으며, 이것은 일제 치하의 상황에서도 고등 교육과 연구의 침체를 조금이나마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한국 최초의 간호대학을 개설했고, 6·25동란 때에는 부상자들을 위해 처음으로 의수와 의족을 만들었으며, 국내 첫 근육세포 은행을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의학계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 세브란스 병원. 선구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세브란스 병원이 단순히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인 광혜원을 뿌리로 하고 있다는 것을 뛰어넘어 한국 의학의 발전에 발판이 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세브란스’를 향해

작고 열악했던 광혜원에서부터 시작했지만, 현재 세브란스 병원은 최고의 시설과 규모로 한국 의학 분야의 최고 자리에 우뚝 섰다. 120주년을 맞은 세브란스 병원은 지난 2월 세브란스 새 병원을 완공했으며, 이어 지난 4일 개원함에 따라 더욱 발돋움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로벌 세브란스’로 세계 정상에 자리매김 할 세브란스 병원을 기대해 본다.

/양민진 기자 jmuu@  , 임기령 기자 ohling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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