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받이

-고운기

일가를 이끄는 사내는

흰 남방에 바지를 입었다

비오는 논둑길 마을은 먼데

지아비를 따르는 식솔들에게

차라리 우산은 바람에 날리기만 하고

저 사내의 좁은 어깨가

일가의 비받이.


 

자식을 낳아 키워 본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자식을 낳았다는 건 너무도 큰 일을 저질러 놓은 것이다. 그들은 망망한 삶의 판 위에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는 속수무책인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밥을 벌고 땔감을 구하는 한편, 우물을 파 단 물도 길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들은 식솔을 거느리는 짐을 짊어진 삶의 짐꾼이다.
학생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혈육의 기대나 눈길을 의식하여 서서히 존재의 허망한 망망대해에 빠져드는 것을 본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어깨는 점점 움추러들어 보인다. ‘좁은 어깨’로 내리 퍼붇는 비를 온통 맞아야 하는 ‘비받이’는 비록 한 집안의 장남이거나 외아들만은 아니다. 공부에만 몰두하는 인문학 전공의 남녀 고학년 학생들을 보면서 늘 내 가슴 한 편은 아리다.  

 /정현기 교수(문리대·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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