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좋은 단편 한 조각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방대한 양과 그 속의 수많은 중세시대의 고유명사에 질려 책을 덮어버린 경험이 있다면 보르헤스에 주목해보자.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평생 단 한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고 단편 소설만 쓴 작가로 유명하다.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다』의 저자 송병선씨는 “보르헤스는 전통적 리얼리즘에 반기를 들고 이른바 ‘환상문학’을 개척했고, 귄터 그라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20세기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며 보르헤스가 현대 문학에서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 설명한다.

보르헤스는 엄청난 독서량과 유전적인 이유로 인해 30대 후반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는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작품을 써냈는데 그의 이러한 신체적 결함은 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실제라고 믿었던 것을 허구로 끌어내리고, 허구라고 믿었던 것을 실제로 승격시켜 놓는다. 또한 시력 상실로 인한 제약은 그가 단편 소설을 통해 압축미를 표현하는데 주력하도록 했다. 그는 대표 작품집인 『픽션들』(1941)의 서문에서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것만큼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짓은 없다”고 말하며 알찬 단편들을 써내 짧은 소설에도 많은 생각이 들어갈 수 있음을 여러 작품들을 통해 증명했다.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단편 작품집인 『픽션들』은 말 그대로 ‘픽션’을 모아놓았다. 그 중에서도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은 20세기 후반 문학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뤄졌던 ‘읽기’의 문제에 이미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20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삐에르 메나르’라는 허구적 인물이 등장한다.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만을 그대로 베껴 썼음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게 된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메나르의 작품 목록이 길게 등장한다. 이 허구적인 작품 목록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독자들은 순간 이 허구적 인물에 대해 착각에 빠지게 되나 그것은 보르헤스 식의 ‘환상적 사실주의’ 트릭일 뿐이다. 작품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메나르가 새로운 『돈키호테』를 쓰는 과정이 나타난다.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외형적으로는 그대로 베끼지만 본질은 다른, 즉 일치하지만 일치하지 않는 『돈키호테』를 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사용된 문체는 그 당시의 일상 언어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베낀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원작과 같은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작가가 17세기 언어를 구사한 ‘본질’이 다른 작품이 되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이런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의를 시도한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세계의 신비를 인간이 온전히 알 수 없기에 문학작품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로 그쳐야 하고, 그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10여장의 짤막한 소설에서 탐정소설 구조뿐만 아니라 환상적 사실주의까지 구현한 보르헤스의 작품은 짧지만 마냥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단편은 읽으면 읽을수록 양파 껍질을 벗기듯 새로운 속살을 탄생시킨다. 여름이 되기 전 오랫동안 앉아 책을 읽기가 힘들다면 잠깐 보르헤스의 속 깊은 단편에 생각을 맡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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