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봄날이 가면 그뿐/숙취(宿醉)는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봄날은 간다>

 기형도를 읽으며 밤을 잡아먹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은 언제나 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난 겨울, 밤 11시가 넘으면 언제나 나는 기형도 생각이 났었던 것이다. 그의 음울하고 안개 같은 언어들이 밤이면 나의 목덜미를 핥으며 귀에서 코끝까지 애무하며 지나갔으니 이 얼마나 고약한 일인가. 나에게 봄은 잔인하지 않았다. 봄날에는 기형도의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제 완연했던 봄도 다 갔다. 다시 그의 언어들이 병사처럼 나의 주변에 진주해 온다. 원래 그런 것이다. 봄날은 가면 그 뿐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기형도의 시는 지하철에서 왔다 갔다 하며 졸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니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온갖 폼을 다 잡으며 읽어야 한다. <엄마 걱정>에서처럼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비단 엄마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혹자는 잃어버린 사랑을 기다릴 수도, 혹자는 잃어버린 용기와 꿈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자는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중략)…/한 학기 내내 그는/모든 수업마다 침묵하는/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중략)…그러나 어쨌든/그 다음 학기부터 오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학설이라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소리의 뼈>는 재미있다. 소리의 뼈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건 역시 침묵일 것이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있는 침묵. 그 소리가 소리로서 인식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게 바로 침묵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그동안 참 많은 소리를 내면서 살아왔다. 무의미한 온갖 잡담들,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했던 수많은 회의들, 남 욕하기, 험담하기 등등 나의 언어 중엔 가시도 많았으리라. 시끄러운 현대사회에 소리의 뼈가 침묵이란 학설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 학기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수업시간 마다 침묵을 했다는 한 교수의 수업 이후로 모든 소리들을 더 잘 듣게 되었다는 화자. 그렇다. 침묵은 우리의 귀를 열게 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는 그 제목이 영화제목으로 많이 쓰였다. <질투는 나의 힘>, <봄날은 간다> 그리고 여기 <빈집>까지. 사랑을 잃고 화자는 모든 것과 작별한다. 짧았던 밤에도, 겨울 안개에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에도 사랑을 할 당시의 화자의 추억이 담겨 있다. 그 모든 것을 화자는 빈집에 두고 자신만 홀로 떠난다. 자신이 느꼈던 그 모든 감정과 추억들을 빈집에 가두어 둔 채, 자기 혼자서만 떠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가여울 수밖에.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되뇌는 화자의 안타까움이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의 나에게도 강한 아픔을 준다.

뭐가 그리 슬프고 심각했을까. 기형도의 모든 시는 어둡고 무겁다. 요절한 젊은 시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나이 많은 노인들이나 할 법한 인생의 무거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달한다. 기형도. 누구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으리라. 다음의 시행에서 내뱉은 그의 고백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는 삶에 시위하다 그만 빈집에 갇혀버렸던 것이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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