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로 카뮈의 <이방인>은 시작된다. 허나 화자는 담담하다. 그에겐 슬픈 기색이 없다. 엄마의 시신을 마주하고서도 그는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너무 슬퍼서 말을 하지 못할 지경이 된 게 아니다. 그는 다만 무감각하고, 슬픈 상황에 끼어들지 못할 뿐이다. 슬픔이란 감정에서 마저도, 화자에게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영화는 때때로 우습기도 했지만 정말 너무 시시했다. 마리는 다리를 내 다리에 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화가 끝날 무렵 키스를 한다는 것이, 서투르게 되고 말았다. 영화관을 나와 그녀는 내 집으로 왔다.

장례식이 있은 지 하루도 안 됐을 때의 모습이다. 엄마의 죽음이 그의 일상을 흐트러뜨리진 못했다. 애당초 슬픔이 없었으니 죄책감도 없다. 화자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사실 그에겐 사랑이란 감정이 생겨날 수도 없지만), 또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를 나간다.

엄마의 죽음이 그에게 어떠한 슬픔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후에 그의 목을 죈다. 화자는 어처구니없는 싸움에 휘말려 아랍인 한 명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가 엄마의 죽음 후 어떠한 슬픔의 내색도 없었다는 사실은 재판장에서의 그를 돼먹지 못한 인간으로 몰아붙인다. 그에겐 재판도 귀찮고, 이제 사는 것도 귀찮다. 아랍인을 왜 죽였냐는 판사의 말에, 태양빛이 눈부셔서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죽음의 직전에서, 자신의 마지막 소원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라 얘기한다.

‘피고석에 앉아서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는 화자. 그에겐 심각한 것도 없고, 가슴 사무치게 그리운 것도 없다. 그는 심지어 자신에게 조차 무관심한 방관자이다. 무표정한 부조리로 점철된 카뮈의 언어는 나를 불편하게 했다. 세상에 던져진 것, 그 자체가 이방인이라는 그런 느낌과 적어도 생각에서만은 소설 속 화자와 나 자신이 너무 닮아 있어서 그랬으리라. 그의 부조리는 나의 가슴에서만은 이방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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