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여학생회는 여성주의 시각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가부장 중심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 성차별 주의가 낳고 있는 수많은 억압들에 반대하고, 그로 인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혹은 드러낼 수 없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성주의 시각이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총여학생회비 논란 속에서 우리는 여성주의와 여성주의에 기반한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여성주의를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은, ‘총여학생회는 여성들만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고, 남성들에게 적대적이다’ 라는 말에서 잘 나타는 듯 하다.

하지만 그 말을 곱씹어보기 전에 꼭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 사회가 ‘여성과 남성’이라고 하는 성별을 어떻게 위계화 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 - 제도/법/문화/언어/이데올로기- 에는 성차별과 성폭력, 그리고 성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성별권력관계가 너무도 깊숙이 스며있다. 이렇게 여성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총여학생회의 활동이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여성주의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성별권력관계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미 왜곡ㆍ편집하여 받아들인 총여학생회/여성주의에 대한 그대들의 단상’이다. 총여학생회 게시판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번 논란에서는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성향’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 “남성들에게 적대적이기만 한 총여학생회가 남학생들의 회비까지 받으면서, 정작 남학생들에게 투표권이 없다는 것.”

하지만 총여학생회 활동이나 수많은 여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남성’(인격화된 개인이 아닌, gender로 설명될 수 있는 남성성/남성다움)의 경험만이 존중받고, ‘남성’의 경험을 설명하는 언어이 인정받고, ‘여성’의 경험마저 ‘남성’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려하는 현실 때문인 것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스스로를 설명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남성’의 시선에 의해 설명되어지고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여성’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남성’의 경험과 언어를 이해해야 하지만, ‘남성’은 ‘여성’의 경험과 언어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대학 사회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미 이렇게 만들어져있는 구조 위에서, 여성들이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여성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너무나도 견고하게 짜여져 있는 가부장 중심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를 해체시켜나가는 작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총여학생회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모두 여학생에게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총여학생회는 여학생들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집단이 아니다. 총여학생회는 ‘모든’ 여학생들을 대변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생물학적 남성을 배제시키고 있는 집단도 아니다. 여학생들 중에서도 여성주의가 와 닿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남학생들에게도 여성주의가 하나의 출구로 다가갈 수 있다. 일상 속에 얽혀있는 수많은 권력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남성들 역시 가부장주의 이성애중심주의에 갇혀, 자신의 다양한 모습들을 발견해내고 키워내지 못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게 실현/재현되고 있는 여성들/남성들의 모습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권력 기제를 끄집어 올려, 하나의 ‘정상적’인 모델과 역할을 강요하는 현실에 저항하고, 다른 여타의 공간에서 반영되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담아내고자 한다.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가 따로 세워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부장사회에서의 총학생회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힘들다.) 이 과정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일상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기에, 편안히 일상을 영유하던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적대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여성주의를 대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고 스스로의 모습을 성찰해야 한다.


이미 ‘여성주의’의 ‘여성’은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사회의 권력망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 힘들었던 존재로서 여성은, 그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자운동과 맞닿아있는 지점들이 많다. 소수자운동의 시작은 소수자의 목소리와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들은 소위 ‘정상인’이기 때문에 소수자가 받는 고통과 억압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소위 ‘정상인’이 아닌 사람들은 '정상인‘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혹은 상상하지 않는 경험들을 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그것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그것들을 전복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시도들을 해나가려고 한다.

그 과정은, 이미 ‘객관적/논리적’이라고 말해지는 이 사회의 보편적 인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객관적/논리적’이라고 판단되어지는 기준들과 소위 말하는 ‘정상적이고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배제하면서 형성되어 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누구’의 시선에 의해서, 특정한 ‘누구’의 편의를 위해서 선택되고 재단되어진 것들이다. 때문에 소수자의 목소리와 경험을 바라볼 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눈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보편타당한’ 그 시선은, 자신도 모른 채 학습해온, 아주 조악하고 무서운 시선이다.

이번 총여학생회비에 관한 논란 역시, 올라오는 글들 중 많은 부분이 다소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왜곡ㆍ편집하여 받아들인 총여학생회/여성주의에 대한 잘못된 단상을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한 채, 우리에게 ‘남성’의 언어와 논리대로 ‘해명’하기를 요구하였고,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도 총여학생회/총여학생회장/여성을 비방하는 글이 많았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말을 하던 간에 ‘남성’의 언어와 논리에 의해 재단될 수밖에 없는, 애초부터 소통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총여학생회는 이러한 목소리들이 있기에 더욱 여성주의를 고민하고 실천해나갈 것이다. ‘총여학생회는 도대체 왜 있는 거야’ 라는 질문 아닌 주장 앞에서, 여성주의적 언어의 확장이 너무나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총여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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