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을 뚫고 결국 봄이 왔다.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곧 산천은 개나리, 진달래, 목련, 철쭉으로 물들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자연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살아 있으되 건강하지는 않다. 우리의 자연은 이미 너무 많이 다친 상태다.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연 속의 존재이다. 따라서 자연의 파괴는 결국 우리 자신의 파괴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살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살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참으로 추구해야 하는 사회적 과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생태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파괴를 통해 성립한 근대 사회의 문제를 넘어선 유일한 탈근대 사회의 전망이다. 생태사회가 아닌 탈근대 사회란 그럴 듯한 거짓말일 뿐이다.

‘에코캠퍼스’는 이러한 탈근대 사회를 대학교라는 공간에서 실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코캠퍼스’는 오늘날과 같이 자연의 파괴가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는 시대에 맞서서 대학이 생태사회의 과제를 이루기 위해 펼치는 구체적인 실천이라는 사회적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오늘날 사실상 거의 모든 대학이 ‘에코캠퍼스’를 표방하면서도 실제 내용으로는 그것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일들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90년대 이래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건물의 신·증축은 그 좋은 예이다. 자산을 늘리기 위해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건물의 신·증축이 활발히 이뤄졌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대학의 자연은 파괴되고 대학의 구내는 갈수록 갑갑한 인공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에코캠퍼스’는 사실 이루기 쉽지 않다. 첫째, 여기저기에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고층건물은 그 자체로 반생태적이다.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설수록 ‘반에코캠퍼스’이기 쉽다. 둘째, 햇빛에너지를 널리 사용해야 한다. 고층건물이 아니더라도 멀리 떨어진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생산하는 캠퍼스는 ‘반에코캠퍼스’일 수밖에 없다. 셋째, 물을 재사용할 수 있는 ‘중수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서울에 물을 대기 위해 멀리 강원도와 충청도의 땅까지 물에 잠겨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네째, 대학에서 발생하는 모든 폐기물을 재활용해야 한다. 멋대로 쓰레기를 버리는 자들은 각성하라.

‘에코’라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캠퍼스에 나무 몇 그루 심는다고 해서, ‘에코캠퍼스’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태사회를 향한 생생한 실험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요건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이 ‘에코캠퍼스’의 이름으로 ‘반에코캠퍼스’를 짓고 있는 것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야 ‘에코캠퍼스’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 자체의 신뢰성조차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대학은 현재의 산업이 아니라 미래의 자산이다. ‘에코캠퍼스’는 생태사회의 실험장으로서 우리의 미래를 기르게 된다. 정말로 제대로 투자해야 한다. 투자하는 흉내만 내는 것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기는 ‘천민자본주의’는 생태사회의 가장 큰 적이다. 참된 ‘에코캠퍼스’를 건설해서 생태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자.

/홍성태 상지대 교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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