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산소만 소모하는 청춘들로 세상은 가득 찼다"

▲똑똑똑. 실례지만, 지금 다들 살아있긴 한거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살아 있는지, 혹은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있는가. 지금 저기 하늘 위엔 별들이 굉음을 내며 칙칙폭폭 시위를 하고 있는데, 그런 게 다 들리는가 하는 질문이다. 언젠가 도시의 밤에 꿀꺽 잡아먹힌 그 어느날에도, ‘신비의/모습에 취해,/나 자신이 그 심연의/일부임을 느꼈고,/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라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 그 비슷한 것을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독자를 모독하다니, 이런 천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두근두근 쿵쾅쿵쾅, 그야말로 살아 숨쉬는 존재인 ‘카레닌’이라는 강아지 한 마리가 나온다. 그는 수명이 다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여운 존재다. 이런 그가 밤에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햇살을 마주한다. 게다가 자신의 바로 옆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 내외가 있다. 강아지는 지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행복을 느끼며 성치 않은 몸으로 온 동네를 뛰어다닌다. 살아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는 그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한국 최고의 명문대임을 자랑하는 연세대학교의 강의실을 들여다보자. 강의실은 열심히 공부해 보겠다고 앉아있는 성실한 학생들로 빽빽하다. 교수님은 강의를 하시고 학생들은 필기를 한다. 자유로운 담론이 펼쳐져야 할 이 지성의 본고장엔 의자 소리와 마이크 소리, 그리고 필기하는 소리뿐이다. 학생은 교수님이 어떤 책을 쓰셨는지 알지 못하며 교수님은 학생의 이름을 모른다. 필기엔 진리 아닌 진리들로 가득하다. 허나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고, 그 속에서 주체는 없어졌으며, 저마다 객체가 되어 살아 있지 못하게 된 것뿐이다. 산소만 소모시키고 있는 죽은 강의실, 우리는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강의실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바가 뭔지 모른 채, 우두커니 산소만, 시간만 소모하고 있는 청춘들로 이미 세상은 가득 찼다. 저마다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실재하지도 않는 타자의 욕망과 역사의 욕망에 따라 시간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그렇게 하나의 객체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기 생의 주체로 우뚝 서기 위해 당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만의 은밀한 내면에 귀를 기울여 보자. 자기 발견과 주체성의 회복은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도취의 순간으로 자아를 이끌 것이며, 이는 생명을 지닌 주위의 모든 사물을 그야말로 살아있게 할 것이다.

▲날씨가 투명한 그 어느 날, 멋지게 차려입고 푸르름과 마주서자. 파란 하늘은 입을 벌렸고, 그 목젖에 있는 해님이 우리의 관자놀이를 향해 마구 입김을 내뿜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뭇가지가 춤을 추고 모든 존재가 생명을 잉태했다. 살아 있는 것 모두가 들떠서 한바탕 파티를 이루는 순간이다.

▲똑똑똑. 다들 살아 있긴 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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